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사 「피로스의 승리」
- 역사
- 2023. 1. 9.
피로스 전쟁
피로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인으로 '에페이로스'의 왕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척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피로스 전쟁'은 기원전 280년부터 약 5년간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시칠리아 섬에 걸쳐 피로스 왕이 벌인 전투의 총칭이다. 당시 산악 민족인 '삼니움족'과 40년에 걸친 싸움에서 승리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렸던 이탈리아 반도 남쪽을 장악한 그리스 도시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로마는 이미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로마 근처의 라틴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고, 삼니움족까지 흡수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군사 강국이었다. 이런 로마와 전쟁을 치르게 된 그리스계 도시였던 '타렌툼'은 바다 건너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여러 나라가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해서 각지에서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피로스도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타렌툼의 구원요청을 받은 피로스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출정하게 된다. 타렌툼에서는 피로스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전쟁준비도 안 한 채로 유흥을 즐기는 등 평상시처럼 행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피로스는 극장이나 목욕탕 등 유희시설을 폐쇄하고 장정들을 징집해서 강제로 훈련을 시켰는데, 많은 그리스 시민들이 이에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피로스는 이때까지 로마와 한 번도 전투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반대편인 로마도 피로스가 데려온 전투코끼리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사실상 로마 군단과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가 처음으로 격돌했던 이 전투는 근처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의 이름을 따서 '헤라클레이아 전투'라고 불렸다.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이끈 로마 군단은 처음 겪어보는 싸움에서도 상당히 선전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코끼리가 개입하면서 피로스의 군대에 패배하게 된다. 코끼리 자체를 처음 보는 로마 군단병 입장에서 그 공포는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로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우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코끼리와 익숙해지게 된다. 전투 후 피로스는 로마에 협상을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는 협상을 거절하고 대신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 몸값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피로스는 이 몸값을 거절하고 무상으로 포로들을 풀어주었고, 로마도 이에 잡고 있던 포로들을 돌려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피로스는 로마로 쪽으로 진군했던 것 같으나, 그의 앞에 새로운 로마 군단이 나타났고, 이에 상황이 여이치 않음을 느낀 피로스는 군을 뒤로 물리게 된다. 겨울 동안 피로스는 로마에 점령된 도시들이 이반 하기를 기다렸는데, 피로스에게 돌아선 도시들은 몇 안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인 기원전 279년, 북상한 피로스는 다시 로마 군단과 만나게 된다. 피로스는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과 다시 한번 전투하게 된다. '아스쿨룸 전투'에 대비해서 로마군은 전의 전투에서 얻은 교훈으로 여러 가지 코끼리 대비책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전차를 이용하거나 투석기를 이용해 돌을 던지고 무기에 불을 붙여서 코끼리를 쫒으려고 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로마 군단은 피로스에 대항에 잘 싸웠으나 코끼리를 잘 이용하는 피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그러나 피로스도 생각보다 잘 싸우는 로마 군단에 의해 피해를 많이 보았고, 전투 후에 '이러한 승리를 한번 더 하면 우리는 망한다'라는 말을 남겨 '피로스의 승리'라는 고사가 생겼다. 로마는 두 번의 패배에도 피로스와 협상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난처해진 피로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어 지원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피로스의 제의를 거절하고 로마와 동맹을 하게 된다. 사실 당시 상황에서는 로마는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 머물러있는 중규모 국가에 불과한데 반해, 만약 피로스가 승리하여 마그나 그라이키아 전체를 영향권 안에 두게 되면 자신들의 시칠리아 섬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나중에 카르타고 전체를 휩쓰는 불씨를 남기게 된다.
시칠리아 전선
로마와 카르타고가 동맹을 맺으면서 전선은 자연히 시칠리아 섬까지 확대 되었고, 이에 시칠리아 동부의 그리스계 도시였던 '시라쿠사'에서 피로스에게 도움을 제안하였다. 피로스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을 별로 따르지 않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도시들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피로스는 다시 시칠리아 섬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우선시한 것 같다. 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서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피로스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를 포위하였다. 피로스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카르타고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많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이 피로스에게 협력을 약속하였고, 피로스는 '파노르무스'(현재의 팔레르모)와 '에릭스'(현재의 에리체)를 점령하였다. 이에 놀란 카르타고는 '릴리바이움'(현재의 마르살라)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철수하겠다며 협상을 요청하였지만, 시칠리아 섬 전체를 원했던 피로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시칠리아 섬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피로스는 많은 병사와 공물을 원했고, 이로 인해 불만이 커진 도시들은 다시 피로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칠리아 도시들의 내분과 카르타고 함대의 재해권 장악으로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피로스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다시 구원요청이 오자, 즉시 시칠리아를 떠나기로 한다. 기원전 275년 '베네벤툼 전투'에서 피로스 전쟁의 마지막 싸움이 막을 열게 된다. 피로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는 집정관인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를 보내 그를 저지하게 한다. 로마 군단은 남하하여 '말벤툼'이라는 도시에 주둔하였다. 당시 피로스의 군대는 이미 많은 전투로 상당한 병력을 손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마 군단은 피로스의 부대가 지금까지 로마 군단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코끼리에 대한 대책을 이미 마련해 두고 있었다. 양군이 격돌하였을 때 삼니움족에서 받아들인 '필룸'이라는 투창을 이용해 로마 군단이 코끼리를 무력화시키자, 피로스는 군대를 물리게 된다. 코끼리를 다 잃은 피로스는 더 이상 로마 군단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는 그대로 타렌툼으로 후퇴한 후에, 이윽고 전쟁을 단념하고 에페이로스로 돌아가 버렸다.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는 마을 이름을 '좋은 바람'이라는 뜻의 베네벤툼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패권은 로마가 차지하게 된다.
마케도니아의 왕
피로스는 생애 마케도니아에 상당히 집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복귀하자 다시 마케도니아를 공략하였다. 마케도니아를 수중에 넣고 있던 '안티고노스 2세'를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을 칭한 피로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주변의 전쟁에 개입을 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간 피로스는 먼저 '스파르타'를 공격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시 '아르고스'를 공격하다가, 안티고노스 2세와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다음가는 명장이라고 유명한 '한니발 바르카'가 이야기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전투에서 각각의 병력의 규모나 장비 등의 차이가 상당히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대단한 지휘관이자 전술가인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전략적으로는 별로 유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패권을 쥐기 위해 여기저기 싸움에 끊임없이 개입하여 전쟁을 일삼는데 반해, 정복지역에서는 통치자로서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치르면서 사방에 적을 만들어 놓는다. 심지어 한번 시작한 전쟁을 끝내지도 않고 다음 전쟁에 계속 참여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고 까지 불렸음에도 그가 소국의 왕으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