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위기 「제2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 바르카」
- 역사
- 2023. 1. 10.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태어난 남자
'한니발 바르카'는 로마와 '카르타고'사이에 있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카르타고의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다. 전쟁 막바지에 참전한 하밀카르는 전쟁 수행 의지가 떨어지는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막강한 로마 군단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지만, 카르타고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공격당하여, 본국에서 벗어나 '히스파니아'(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당시 하밀카르는 9살밖에 안된 아들 한니발을 신전에 데려가 카르타고의 신인 '타니트'에게 로마에 복수할 것을 맹세하게 시켰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로마에 전해 내려온다. 하밀카르는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을 빠르게 확장시키면서 광산 개발을 하는 등 기반을 다졌지만, 히스파니아 원정 도중 전사하였고, 이후 그의 사위였던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카르타고에는 하스드루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아서, 하밀카르의 사위인 하스드루발은 보통 '공정한 하스드루발'이라고 불리었다. 히스파니아 원정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뜻으로 '카르타고 노바' 혹은 '카르타헤나'라고 불렀다고 하며,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카르타고의 영향력보다는 바르카 가문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 같다. 이후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면서 카르타헤나는 젊은 한니발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당시 한니발의 나이는 26세였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는 '시칠리아' 섬이었다. 당시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반도에 틀어박혀 있던 로마는 필연적으로 둘 사이에 있던 시칠리아 섬에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기원전 241년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기원전 219년까지 무려 20여년의 세월 동안 로마도 카르타고도 상황이 많이 변해있었다.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섬들을 빼앗아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재해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반도 북부와 해안을 따라서 이베리안 반도 쪽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또한 빼앗긴 지중해 재해권으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히스파니아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장은 완전히 뒤바뀌어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첫 전투는 기원전 219년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 동쪽 해안에 있었던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현재의 사군토)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에 원로원 사절을 보내어 항의하며 한니발의 신병을 넘길 것을 요구하였지만, 카르타고가 이를 거부하면서 로마가 선전포고하게 된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습격한 한니발
한니발은 전쟁기간 동안 로마의 대군을 몇 번이나 패퇴시키고 종횡무진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누볐지만, 사실 가장 유명한 것을 바로 겨울의 '알프스'를 넘었다는 것일 것이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에서는 바로 군단을 두 개로 나눠 시칠리아와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로 보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당시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로마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는 시칠리아 섬을 통해서 남부로 들어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평탄한 해안지역을 거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로마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실리아를 경유하여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본국을 직접 공격하려고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허를 찔러 아무도 생각지 못한 길을 택하였다. 아마 카르타고도 이건 생각지 못했을 것 같다. 알프스 산맥의 험준함을 굳이 논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험준함 뿐만 아니라 당시가 고대 시절인 것을 생각하면, 변변한 가도도 없었을 것이며, 등산 장비 같은 것은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한니발의 부대는 기병과 코끼리까지 있었다. 이는 근대로 따지자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제국의 '임팔 작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니발도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놀라게 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부대를 상당히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간에서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방법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 알프스를 넘지 않고 그냥 해안지대에서 로마 군단과 싸우고 진군하였더라도 비슷한 정도의 피해 밖에 입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로마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군단을 이끌고 마실리아에서 한니발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알프스로 향한 것으로 보고 군단을 히스파니아로 진군시키고, 본인은 다시 로마로 귀환하여 새로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로서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 군단과 한니발의 부대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 군단을 물리쳤고 지휘관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부상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족'이 대거 한니발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시칠리아로 갔던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군단이 북상하고 있었다. 전열을 정비한 로마 군단과 한니발의 부대는 '트레비아 강 전투'에서 다시 격돌하였다. 로마는 다시 한번 패배하였고, 알프스 이남 지역의 갈리아족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게 된다. 전쟁동안 한니발은 계속 갈리아인들이 로마와 결별하도록 획책하였는데, 이는 현대의 형태인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도시국가 단위의 연결체였던 로마 공화국의 힘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더불어 적진 깊숙이 진격해 있는 한니발은 로마와 결별한 갈리아 부족으로부터 용병을 고용하거나 보급을 충족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이 히스파니아에서 데려온 정예병을들 보존하기 위해 많은 갈리아 용병을 고용하고, 그들을 전투에 활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계절이 겨울이 됨에 따라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게 된다.
한니발과 로마의 전투
기원전 217년 봄이 되자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로마에서는 새로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으로 뽑아 한니발과 대치하도록 하였다. 두 집정관은 한니발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아펜니노 산맥 쪽 통로인 '아레티움'과 아드리아해 방면의 '아리미눔'으로 나뉘어 주둔하였다. 한니발은 자신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행군하여 아펜니노 산맥을 넘었고, 로마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주변에 '에트루리아인'들의 도시를 공격하였다. 한니발의 위치를 파악한 로마의 두 집정관은 연합하여 대항하려고 하였지만, 한니발은 로마 군단이 합세하기 전에 각개격파 하기로 마음먹었다.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 로마 군단의 추격을 예측한 한니발은 호수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켰고,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던 로마 군단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집정관인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에서도 영향력을 잃게 되었지만, 오래전부터 로마와 함께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별로 한니발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니발은 로마를 눈앞에 두었지만 공격하지 않았고, 주변 도시를 공략하면서 로마를 고립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로마는 한니발을 로마의 위기로 받아들여,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한니발에 대항하도록 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한니발을 견제만 하면서 계속 따라다니는 지구전으로 괴롭혔다. 싸움이 교착상태가 되고 로마 근교의 도시들의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굳건하자, 한니발은 남부로 이동하였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술은 당시 상황에서 한니발을 상대로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를 '꿈 뜬 사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인 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한니발과 싸우게 하였다. 한니발이 계속해서 로마의 영역 안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소극적인 전술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로마에서는 대규모 군단을 편성하여 한니발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를 원했다. 두 집정관은 약 8만의 병력을 이끌고 5만의 한니발 부대와 칸나이 평원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칸나이 전투'는 현대의 각국 사관학교에서도 포위섬멸전의 교본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할 정도인데,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의 대군을 포위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6만명 가량이 전사하고 1만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총사령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는 퇴각하였지만 다른 집정관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하였고, 전직집정관으로 지휘하고 있었던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도 전사하였다. 그 외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한 원로원 의원 80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는 대신 로마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데 치중하였다.
이탈리아의 방패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다. 사방에서 로마에 반란한 도시들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캄파니아' 지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 시칠리아의 일부 도시들까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다. 당시 로마는 매우 감정적이었지만 동시에 차분하게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지금 있는 부대로 로마를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는 로마 남쪽에서 로마의 동맹도시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주했고, 이탈리아 반도 외부에서도 지원군을 물색했다. 한니발의 입장에서 시간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고, 로마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히스파니아 지방에서는 로마군에 의해 한니발에게 지원군을 보낼 여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낸 함대는 시칠리아에서 로마 함대에 패하여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하였다. 유력한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조한데 반해, 많은 다른 도시들은 로마에 계속 협조하였고, 그리스에서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만이 한니발에게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로마 군단은 한니발을 상대하는 전술도 바꾸었는데, 기존의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했던 데로 한니발을 견제할 뿐 전면전을 삼가고, 다른 군단들은 반란한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로마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후에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이탈리아의 방패'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탈렌툼'을 함락하거나 '시라쿠사'가 협력하는 등 몇 가지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유의미한 성과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로마와 주변 도시들은 한니발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한니발에게 협조하는 도시들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고, 로마는 많은 군단을 소집하여 한니발이 없는 곳에서 배신한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이탈리아 반도 외부에서 로마는 계속 승전하였고, 반도 내에서도 한니발이 없는 곳에서 로마 군단은 그 저력을 보여주었다. 필리포스 5세도 로마 군단에 밀려 한니발과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한니발도 병력을 나누어 대항하려 하였지만, 한니발의 병력만 소모될 뿐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한니발은 한때 로마 군단에 포위된 '카푸아'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까지 진군하였지만, 자신의 군대를 보고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 로마를 보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전황은 이탈리아 밖에서 움직였다
로마는 개전초기부터 계속해서 한니발의 근거지였던 히스파니아를 공략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러한 전략은 한니발의 부대에게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진 못 하였지만, 반대로 카르타고의 전력을 묶어두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히스파니아는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로마 군단을 지위하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형제는 아주 효과적으로 카르타고 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히스파니아 지역 외각에서 카르타고의 전력을 착실하게 깎아나가면서, 동시에 카르타고의 영향권 안에 있던 도시들을 선동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을 포섭하였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 본국은 접근하기 어려운 국외의 이탈리아 반도의 한니발에게 지원하는 것보다, 카르타고의 영향력 안에 있는 국내의 히스파니아에 지원하는 것을 더 중시한 것 같다. 이런 본국의 지원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전열을 정비하여 로마와 대치하였다. 기원전 211년, 로마 군단의 스키피오 형제는 히스파니아 깊숙이 진격하여 카르타고군과 격돌하였는데,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로마 군단이 패배하면서 스키피오 형제가 모두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성과는 제2차 포에니 전쟁동안 한니발을 제외한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이 로마 군단에 승리한 첫 전면전인데, 안타깝게도 마지막이기도 하다. 이 패배로 인하여 로마가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얻어낸 성과가 모두 무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로마는 히스파니아 전선에서 로마 군단을 지휘할 사령관을 다시 선출하였는데, 이때 당시 26세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자원하였다. 원로원은 나이제한에도 못 미치는 너무 어린 지휘관을 우려하였지만,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시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취임하였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금세 히스파니아 지역을 석권하였고, 히스파니아 지역의 수도에 해당했던 카르타헤나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때까지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카르타고 군에 협력하던 '누미디아' 용병 대장인 '마시니사'와 협상하여, 그를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코르넬리우스 스피키오에게 패배한 이후 남은 군대를 모아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알프스로 향했다. 로마는 바르카 형제가 합류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는데, 다행히도 당시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었고 하스드루발은 북쪽에서 오고 있었다. 로마 군단은 신속하게 전개하여 메타우르스 강에서 카르타고 군과 격돌하였다. '메타우르스 전투'에서 로마 군단이 승리하였고 하스드루발은 전사하였다. 한니발은 지원군이 패배하고 동생이 전사한 것을 알고 크게 상심하였다고 한다.
카르타고 본토 결전
로마가 히스파니아 지역을 석권하고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 끝에 고립되면서 카르타고 본거지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원로원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떠올리며 주저하였지만,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그를 북아프리카 방면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위임하였다.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곧바로 카르타고와 동맹하고 있던 누미디아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잇따른 전투에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를 점령하였다. 이후 자신에게 협조적인 마시니사를 누미디아의 왕으로 앉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넓히면서 동시에 카르타고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니발은 기병대를 전술적으로 잘 활용하였는데, 그 기병대의 주력은 누미디아 기병대 였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그 누미디아 기병대를 자신의 아군으로 붙이게 된 것이다. 카르타고 본국이 위기에 처하자,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로마 군단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자신이 가장 잘 사용하던 전법으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로마와 평화협상을 하게 되는데, 카르타고는 본국 외에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군사력도 제한되었다. 이 조치는 이후 카르타고의 멸망의 단초가 된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로마로 개선하여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아프리카누스'의 칭호를 얻었다. 한니발은 전쟁 후 끊임없이 정치적으로 공격받았고, 이에 시리아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도 계속 경계되어 크레타섬과 소아시아 각지를 떠돌다가 독을 마시고 사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