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6대 황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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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유폐된 어린 시절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33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이고, 배다른 형제로 '콘스탄티우스 갈루스'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3명의 아들과 4명의 조카가 있었는데, 그는 제국을 5분할하여 각각 아들들과 두명의 조카가 다스리게 하여,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12세의 갈루스와 6세의 율리우스를 제외한 이들이 몰살 당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3명의 아들 혹은, 그들중 한명인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제국을 3분할하여 다스렸는데,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국의 동방을 맡아 관리하였고, 본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가 맡을 예정이었던 '폰토스'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지역과 시리아, 이집트 등이 이에 해당되었다. 살아남은 갈루스와 율리우스도 콘스탄티우스 2세의 관리 아래에서 '니코메디아'에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 아들들은 기독교를 중심 종교로 로마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들도 기독교 성직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342년에는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서 유폐 생활을 하였으며, 바깥 세상과 격리되어 관리하는 노예의 자식들 정도 밖에는 교류할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내전의 시작과 해방

350년 콘스탄티우스 2세와 '페르시아'의 싸움이 지속되는 동안, 권력다툼을 하던 형제들이 전사하거나 처형당하면서, 로마 제국의 서쪽에는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가 황제를 참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형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제국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반란 진압을 준비하였는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페르시아가 쳐들어올 것을 우려하였다. 결국 혈연관계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해방하고, 갈루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려 부재중 자신을 대신해서 동방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이때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의심많은 황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여동생인 '콘스탄티나'를 갈루스와 결혼시켰지만, 갈루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 서방을 어느정도 안정화 시킨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4년 갈루스를 체포하였고, 고문과 심문 끝에 반란죄로 처형하였다. 이때 사전에 콘스탄티나가 오빠를 설득하기 위해 먼저 찾아가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병이 들어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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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누스 카이사르

율리아누스도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심문 당했지만, 황후였던 '플라비아 에우세비아'의 도움으로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 였지만, 페르시아의 위협이 점점 다가오자 혼자서는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전부 방비하기 어려웠다. 결국 355년에 율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리고, 갈리아 지역으로 보내 서방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번에도 여동생 '헬레나'를 율리아누스와 결혼 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많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제대로된 지원을 해주지 않았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 휘하의 지휘관들도 이러한 정치적 구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4세의 젋은 나이에 모자란 병력과 부족한 지원을 가지고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5년간 4차례에 걸친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리아와 라인강 방어선에서 '게르만족'들을 격퇴하였다. 특히 357년에 벌어진 '아르겐토라툼 전투'에서는 두배에 가까운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통해 많은 군단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360년에는 페르시아가 로마 제국으로 쳐들어와서 메소포타미아의 '아미다'를 함락시켰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페르시아 원정을 하기 위해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의 병력을 차출하여 보내도록 요구하였는데, 거의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무리한 요구는 군단 병사들의 불만을 일으키게 하였다. 군단의 병사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요구를 거절하고 율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율리아누스도 이를 받아들였고, 그는 빠르게 '도나우 강' 유역의 정예 군단을 접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도 시급히 페르시아와 강화하고 내란에 대비하였는데, 이 와중에 중병에 걸려서 사망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임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승계하고 사망하였다고 한다.

율리아누스의 통치

로마 제국이 유일한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제국을 개혁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황궁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황궁에서는 사치가 만연하였는데, 그는 쓸데없는 고용인들을 해고하고, 로마가 전제정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긴 환관들도 모두 쫒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재정 지출을 손보고 나서는 세금 체계를 간소화시키고 감면 정책을 펼치는 등 세제 개혁을 펼쳤다. 율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를 모범으로 삼아 철학자 황제로서 통치하겠다고 선포하고,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시민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전제적인 통치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을 볼품없게 여겼다고도 한다. 또 율리아누스는 대표적으로 로마 제국의 종교에 대한 정책을 개혁하였는데, 모든 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밀라노 칙령' 이후로 기독교를 국가적으로 우대하면서, 반대로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교들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교의 이단으로 지정된 종파들은 차별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율리아누스의 정책으로 로마에서는 모든 종교에 대해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리고 파괴된 신전을 복구하거나 옛 종교들의 성지에 들어선 교회들에게 땅을 원래 종교에게 다시 돌려주게 하였다. 동시에 그 동안 정책적으로 행해지던 기독교에 대한 우대 정책들이 폐지되었는데, 사실상 면세로 취급되던 교회의 재산에도 세금이 부과되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기독교의 우대 정책을 통해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재산을 교회에 기부한다던가, 아예 스스로 사제가 되는 등의 폐단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 교사들이 그리스 고전을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일부 기독교 공직자들이 공직에서 쫒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황제가 전통 로마의 방식으로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가, 교회들이 불에 타거나 주교들이 추방되는 일들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것 때문에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배교자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그들은 율리아누스가 종교의 자유를 넘어서 기독교를 배척하고 탄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은 그 내용에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거나, 기독교 자체를 우대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사망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인 이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데, 뿐만아니라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내용은 아니다. 율리아누스도 어렸을적에 기독교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기는 하였으나,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취해진 조치였고, 그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자의적이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배교자라고 부르는 것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게다가 율리아누스는 본격적으로 정책이나 법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재산을 몰수하거나 처형하는 등 탄압을 한 적이 없고, 교회가 불타고 주교들이 쫒겨났다는 것 조차 기독교인 중심으로 서술된 것으로 그 진상에 대해 확인 할 수 없다. 우대받던 입장에서 우대가 사라지는 것은 피해로 느껴질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박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페르시아 원정과 최후

363년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문제를 끝내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 대군을 모은 율리아누스는 그 중 일부를 심복인 '프로코피우스'에게 주어 '아르메니아'를 통해 진격하게 하고, 스스로 나머지 군단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몇번이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에 다다른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격력한 저항에 부딪쳤는데, 프로코피우스가 이끄는 군단이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퇴각하는 도중에 페르시아 군대에 습격을 당했고, 격렬한 전투중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혹은 기독교인이었던 병사가 배신하여 창으로 찔렀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던 전투가 끝난 후에도 부상을 치료하지 못했던 율리아누스는 31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로마 군단은 근위대장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군인 황제 시대로 분류하는 시기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군단에 의해 새로운 황제가 나오는 것을 보면 사실상 로마의 황제는 원래 그런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 율리아누스 이후로 기독교인 황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율리아누스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하게 되었고, 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세계로 점점 더 확고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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