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4대 황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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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황제의 자리를 요구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272년에 마케도니아 북쪽의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흔히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이고, 어머니는 지역 여관 주인의 딸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라고 한다. 293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정제(아우구스투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서방의 부제(카이사르)로 임명되면서 헬레나와 이혼하고, 다른 정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의 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다. 이때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로 들어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디아'에서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활약을 하였고, 이러한 공적으로 고급장교까지 승진하였다고 한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황제자리에서 은퇴하면서, 서방의 콘스탄티우스와 동방의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정제로 승격되었고, 새로 서방에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동방에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부제로 임명되었다. 이때 동방에서 근무하고 있던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서방의 아버지 휘하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의 사위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는 그의 출신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소외되었는데,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뜻으로 황제의 승계구도에서 혈연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 정치 체제'는 두명의 정제와 두명의 부제를 두어 제국의 영토를 4분할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4명의 황제사이에 위계와 승계구도를 만들어 놓음으로, 불시의 사태에도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군사 반란 등 권력을 놓고 일어나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이듬해인 306년 '브리타니아' 원정 중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여, 서방의 정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당시 유일한 정제였던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즉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갈레리우스는 먼저 서방의 부제였던 세베루스가 정제로 승격되게 하고, 대신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를 부제로서 황제로 인정하였는데, 이는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군단을 상대로 내란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두 정치 체제의 근간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게 되었는데, 그 동안 권력에 소외되어있던 막센티우스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똑같이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갈레리우스는 이번에는 이러한 막센티우스의 요청을 거부하였는데, 사실 이미 4명의 황제자리가 전부 채워져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긴 하나, 이는 매우 안이한 처사였다. 거절당한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황제를 참칭하였고, 이미 은퇴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로마로 돌아와 황제위에 복위를 선언하고 아들을 도왔다. 이렇게 되자 로마 제국에는 무려 6명의 황제가 함께하게 되었다.

사두 정치의 붕괴와 내전

황제가 된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정확히 언제부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발레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공식적으로 황제로 인정받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우스가 담당하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일대를 담당하였는데, 주로 라인강 부근에서 '게르만족'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담당 지역의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당히 공포에 의한 통치를 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사태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처하였고, 생포된 포로는 콜로세움으로 보내어 모두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성격에 기반한 것 같은데, 이후로도 그는 집권하는 동안 이런 잔인한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 그러나 내정에 관한 부분은 잘 처리했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인 속주를 발전시켜, 속주민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켰다고 한다. 한편, 서방의 정제였던 세베루스는 자신의 관리지역인 로마에서 일어난 막센티우스의 행위를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군단을 이끌고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에게 패배하였고, 307년 로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도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지만, 도중에 병사들이 탈영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아 퇴각해버렸다. 결국 308년 이러한 제국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는 '카르눈툼'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반대로 막시미아누스에게 빨리 은퇴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회담은 별다른 성과없이 끝났고, 이 회담에서 사망한 세베루스를 대신할 서방의 정제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를 임명하였고,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다시한번 사두 정치 체제의 규율이 흔들렸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황제로 승인을 요구하였을때, 그가 부제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제였던 세베루스를 정제로 승격시키고, 콘스탄티누스 1세를 새로 부제로 임명한데 반대,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그대로두고 새로 리키니우스를 정제로 임명한 것이다. 심지어 전임 서방의 정제였던 세베루스를 갈레리우스의 심복이었으며,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외조카이고, 새로 서방의 정제가 된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더 아이러니 했을 지경이다. 또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는데, 이로인해 사실상 로마에서 밀려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찾아가 의탁하였고, 자신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결혼시킨 후에 콘스탄티누스 1세를 정제라고 선포하였다. 이로서 서방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 리키니우스,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까지 네명의 정제가 있었으며, 동방에는 갈레리우스가 정제로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부제로하여 총 5명의 정제와 한명의 부제가 함께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을 정제로 승격해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이에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그냥 멋대로 정제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야말로 당시 로마 제국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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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재편

310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라인강 인근에 침입한 이민족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하였는데, 이때 이탈리아에 있는 막센티우스를 경계하고자 막시미아누스에게 병사들을 주어 견제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시미아누스는 갑자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사하였다고 하며 병사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급히 군단을 이끌고 되돌아왔고, 병사들을 회유하는데 실패한 막시미아누스는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로 도망갔지만 잡혀서 처형되었다. 311년에는 갈레리우스가 병사하였는데, 동방의 정제로 리키니우스가 취임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취임하였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리키니우스가 서방의 정제임에도 불구하고 동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서방에 강력한 라이벌이 둘이나 있는데 반해 동방에는 갈레리우스가 사망하면서 손쉽게 차지할 수 있는 빈 영역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동방에서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대결구도가 명백해졌고,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여동생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키고 동맹을 맺었다. 312년 '히스파니아'를 제압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를 향하하였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콘스탄티누스는 1세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를 손에 넣고, 로마 제국 서부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을 양분하여 통치하기로 합의 하였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종교 관용에 대한 칙령은 사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기전에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건제한 두명의 황제가 공인함으로 인해 본격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도 막시미누스 다이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제국의 동방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도 얼마 가지 못하였는데, 두 세력은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315년에 '키발라에 전투', 317년 '마르디아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였고, 이로서 리키니우스는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이때 아들인 '파비우스 율리우스 크리스푸스'가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약 7년여간의 평화가 끝나고 324년에 두 세력은 다시 맞붙었는데, 리키니우스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비잔티움'으로 퇴각하였는데, 비잔티움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크리스푸스에게 패배하면서 아나톨리아 지역까지 밀려났고, 결국 니코메디아에서 항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를 강제로 은퇴시켰다가 1년후에 '고트족'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들어 처형하였다. 이로서 로마 제국은 다시 한명의 황제의 통치아래로 돌아오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죽음

명실공히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4년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그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라는 뜻으로 노바 로마(Nova Roma)라고 불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업적 중에는 단연 기독교에 대한 부분이 부각되는데, 그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과거 국가에 몰수되었던 재산들을 돌려주었으며, 기독교 성직자에 대한 세금 면제 등을 하고, 또 십자가 형을 폐지시켰다고 한다. 325년에는 유명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분열되어있던 기독교가 통일된 교리를 가질 수 있게 여러 협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부터 이어져오던 관료제나 군제 개혁도 이루어져, 원로원에 의한 공직 임명 제한이 완전히 철폐되었고, 로마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일요일을 휴일로하는 제도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그외에도 도축업이나 제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대로 직업을 물려받도록 하였고, 남의 토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사람들을 농노로 만들어서, 앞으로 오게 될 중세시대의 환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326년에는 아내 파우스타와 아들 크리스푸스를 간통 혐의로 체포하고 고문하여 죽였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여러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찾고 있으나, 그 진실은 알 길이 없다. 330년 6년간의 노바 로마는 6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완성되었는데, 짧은 공사 기간 뿐만 아니라 원래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에, 건물들이 자주 무너졌다고 한다. 도시 전체를 한번에 완성시킨 것은 아니고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지었으며, 다수의 석재와 조형물들은 로마 제국내의 다른 도시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331년부터 약 1년간 고트족과의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평화협정으로 마무리 하였고, 333년경에는 키프로스 섬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진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7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사망하기 한달 전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행한 기독교 우대 정책이나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은 것 때문에, 그는 기독교인 황제로 평가되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제나 성제로 불리우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을 자식들이 나누어 통치하게 하였는데, 광대한 영토를 나누어 통치함으로서 효율성을 높이고, 동시에 혈연자들을 통치자로 두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에서 제국이 분열된 것같은 부작용을 줄이려고 한 것 같은데, 이러한 안배는 완전히 실패하였고,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한 내전에 휩쌓이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후 노바 로마는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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