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왕정에서 프랑스 혁명까지
- 역사
- 2022. 12. 19.
발루아 왕조의 절대 왕정
백년전쟁에 승리한 '발루아 왕조'의 권력은 점점 더 공고해지는데, 오랜 기간 전쟁이 지속되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해지고 있는 반면 왕실은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 제후들과 기사들의 구심점으로 왕이 존재하고 있는 형태였다. 백년전쟁의 여파로 영국과 프랑스 모두 서양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대이탈리아 전쟁
발루아 왕조의 '샤를 8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이 전쟁에서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 세력을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충돌이 시작된다.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열한 이래 사이가 나쁘지만, 특히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는 합스부르크 가와의 사이가 안 좋다. 오랫동안 항쟁이 지속되었는데, 직접적인 싸움의 시작은 이 '대이탈리아 전쟁'에서부터였다. 양가, 양 국가 간의 유한은 깊어서, 프랑스 왕가의 '프랑수와 1세'는 본래라면 불구대천의 원수로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와 손을 잡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칼 5세'와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우위를 점한 상태로 끝나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는 것으로 대이탈리아 전쟁은 종결한다.
위그노 전쟁
16세기 후반에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그 여파는 프랑스에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프랑스 내에서는 칼뱅파의 개신교도(위그노)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세력이 이에 탄압을 가하면서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도시지역에서는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 사건이 다발하고 있었는데,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사건이 일어나 버린다. 대이탈리아 전쟁에서는 이슬람 세력과도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가 같은 종교 내에서의 세력다툼으로, 그리고 같은 국민끼리 자행한 이 대학살의 희생자 수는 약 3만에서 7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무렵은 세계 사상 최악의 광기라고 불리는 '마녀 사냥'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는데, 유럽 전체가 종교의 광기에 싸여 있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일련의 학살에 의해 위그노 측의 중심인물이었던 '콜리니 제독'이 살해되어, 프랑스 내의 위그노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단번에 위축되었다. 덧붙이자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타리나 데 메디치)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이름 그대로 '르네상스' 시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일원이다. 종교 개혁의 시초가 된 교황 '레오 10세'도 메디치가인데, 구권력이 새로 대두되는 세력에 대한 반발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르봉 왕조
유럽 축구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의 레알은 왕실을 나타내는 단어인데, 이 왕실은 바로 부르봉 왕조를 가리킨다. 현대까지 그 혈맥이 끊기지 않은 부르봉 왕조는 1593년 '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된다. 위그노 전쟁 중에 '샤를 9세'가 사망하면서 발루아 왕조가 단절되어, 발루아가와 마찬가지로 카페 왕조의 방계인 부르봉가의 앙리 4세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는데, 앙리 4세는 원래는 위그노였다. 앞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사건도 실은 앙리 4세를 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가, 다시 위그노로 개종하였다. 실제 왕위는 1589년에 이어받았으나, 그가 위그노인 이유로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에서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 시 역시 앙리 4세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앙리 4세는 영원히 개신교를 버릴 것을 다짐하고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앉게 된다. 그러한 경위도 있어, 앙리 4세는 1598년에 '낭트 칙령'을 선포하여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의 개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며 위그노 전쟁의 종결을 선언한다. 앙리 4세는 백성들로부터 앙리 대왕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결국 광신적인 가톨릭교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지금도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있는 왕 중의 1명이라고 한다. 앙리 4세가 죽으면서 뒤를 이어 '루이 13세'가 즉위하게 된다. 루이 13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마리아 데 메디치)와 섭정인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리슐리외'가 사실상의 실권을 잡고 프랑스를 움직였다.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에도 개입하는 등 국제사회에도 개입해 독일의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대립이 더욱 깊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즉위했을 때 아직 4세의 아이였기 때문에 정치는 실질적으로 전대부터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이 시행하였다. 마자랭의 외교 수완이 있었는데, 이 시기 프랑스는 세계 최초의 국제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독일 30년 전쟁의 종결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1648년에 맺어, '알자스-로렌 지방'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켜 프랑스의 대외 행보를 활발하게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프랑스 귀족에 의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난다. 이것은 30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행한 중과세가 원인이라고 말해지며, 1642년에 영국에서 있었던 '청교도 혁명'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난으로 일시기는 파리를 점거되기까지 하였지만, 결국 반란을 진압하고 국왕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1661년에 마자랭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는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국정을 챙기며 실질적인 친정을 시작하는데, 특히 영토 확대에 의욕을 보이게 된다. 1665년에는 재무총감에 '콜베르'를 임명하고, 소위 '콜베르 주의'라고도 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및 관료제, 상비군의 강화 등을 행했다. 그리고 본인의 혈연을 가지고 각지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에 개입해 나가게 된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테레즈 도트리슈'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의 딸이었는데,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1667년에 그것을 빌미로 네덜란드 남부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한다. 1689년에는 '팔츠 계승 전쟁'(9년 전쟁)을 일으켰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1685년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할아버지인 앙리 4세에 의한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대규모의 위그노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주변국으로 이주하면서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성공 사례는 1701년에 일어난 '스페인 계승전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10년에 걸친 격렬한 싸움 끝에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맺으며 부르봉가는 스페인 왕가의 계승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왕권신수설'이나 '자연국경설' 등을 바탕으로 절대적인 권력으로 침략전쟁을 해온 것에 더해 베르사유 궁전을 개축하거나 하는 등 태양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적이 있는 군주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재정을 크게 악화시켜 '프랑스 혁명'의 요인을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루이 14세를 경계로 프랑스의 국력은 쇠퇴기에 들어간다.
프랑스 쇠퇴기
루이 14세가 사망하면서 불과 5세였던 '루이 15세'가 즉위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낸 것 이외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아무것도 없지 못하였고, 1755년에 일어난 '7년 전쟁'(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주게 되었으며, 동인도 회사는 해산이 되는 등 그 쇠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장자크 루소',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의 인물들이 활동하는 등, 문화적으로는 축복받은 시대라고 해할 수 있으며, 시민 혁명으로의 계단을 밟아 나아가고 있었다. 다음대의 왕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가로서는 마지막 왕이 되는 '루이 16세'가 된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흔히 '시민혁명'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만이 참하였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혁명의 시초는 귀족에 의한 반란이다. 당초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가한 '라파예트' 후작 등의 귀족들이었지만, 혁명이 계속 진행되어 감에 따라 그 구조가 바뀌게 된다. 프랑스 혁명의 단초는 1789년 삼부회 소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 삼부회의 마지막 소집은 1614년으로 루이 13세의 시대였다. 프랑스에서는 '3권 분립'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루소, '시민정부' 이론으로 유명한 '존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 같은, 소위 민주주의에 대한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1688년의 '명예혁명'이나 1776년의 미국 독립전쟁 등 당시에는 혁명에 대한 열기가 각 나라에서 끓어오르던 시대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조제프 시에예스'라는 인물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내용의 출판물을 배포하기도 했고, '앙시앵 레짐'(구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져 있던 것도 혁명을 일으키는 큰 동력이 되었다. 결국 1789년의 삼부회에서는 회의 구조 그 자체 때문에 특권 계급(귀족과 기독교 세력)의 의견에 대해 제 3신분인 평민의 의견은 국정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에 불과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회를 발족시키기 위해서 '국민의회'의 설립을 선언하게 된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그림인 '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이 국민의회를 정식으로 인정할 때까지는 해산하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특권 계급들은 당연히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세 등을 감안했을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국민 의회는 공식적인 의회로서의 승인을 얻게 된다. 이후 왕당파는 제3신분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군을 파리에 집결시키고, 제3신분 출신으로 당시 국민의회로부터 인기가 높았던 '자크 네케르' 재무장관을 파면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화난 군중은 정치범이 다수 수용되고 있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게 되었다. 국민의회는 그 후 '봉건적 특권 폐지'를 선언하고, 유명한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이 시기의 중심인물은 '미라보'나 라파예트 같은 자유주의 귀족이었지만, 국왕과 혁명세력 간의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죽고, 1791년의 국왕 일가가 국외 도피를 시도하다가 붙잡힌 '바렌 사건'이 일어나면서 방향이 바뀌게 된다. 이 해에는 '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면서, 입법의회가 성립되고, 망명귀족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정책이 실행된다. 이 시절의 의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푀양파'와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힘을 가지게 되었고, 지롱드파는 혁명에 반발하여 '필니츠 선언'을 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8월 10일'사건으로 루이 16세의 왕권이 정지되었고 국왕 일가는 모두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광기의 시대
프랑스 혁명은 인권 선언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상이 퍼지기 시작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광란의 역사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연전 연패하던 프랑스군이 '발미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면서 의회는 급진적인 혁명 세력인 '자코뱅파'가 실권을 쥐게 된다. 자코뱅파의 '조르주 당통'이 연설을 하면서 반혁명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반혁명파로 지목받은 인물은 용서 없이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무렵에는 '국민공회'가 설립되었는데, 1792년 9월 21일에 군주제 폐지를 결의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실권을 잡은 자코뱅파는 1793년 1월 결국 루이 16세가 처형되었으며, 이후 10월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처형당한다. 같은 해 2월에는 영국의 '피트 수상'의 제안에 의한 '제1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유럽군주들의 적이 되었다. 3월에는 혁명법원이 설치되고, 4월에는 공안위원회를 설치, 6월에는 지롱드파가 자코뱅파에 의해 숙청되면서 자코뱅파의 독재 정치, 통칭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혁명의 이름 아래 자신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용서 없이 처형하였고,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왕당파의 반란과 대불동맹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1793년 프랑스 헌법'이 선포되었는데 '자코뱅 헌법'이라고도 한다. 이 무렵에는 미터법이나 혁명력의 채용하고, 최고 가격령 등의 각종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다. 결국 지나친 공포 정치는 반대파에 의해 타파되어 '로베스피에르' 등의 자코뱅파의 핵심인물들 또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이를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한다. 그 후 '1795년 프랑스 헌법'(공화력 3년 헌법)이 제정되어 국민공회는 해산하고 '총채 정부'가 수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