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9대 황제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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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

평범한 집안 출신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9년 이탈리아의 '레이타'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금 징수를 대행하는 일을 하였고, 그 일을 그만둔 후에는 고리대금업을 하였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은 귀족이 아닌 부유한 평민으로 세금 징수 일을 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집안이었다. 그러나 돈은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고, 그 재산을 바탕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것 같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는데, 이런 형의 성공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도 집안에서 압박을 받은 것 같다. 36년부터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복무하였고, 37년에는 회계감사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딪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공직 경험을 쌓았는데, 39년에는 안찰관을 지냈고, 40년에는 법무관에 취임하였다. 이즈음 베스파시아누스의 능력을 알아본 황가에 의해 여러 지원을 받은 것 같은데, 그의 출신에 비해서 출세가 빨랐다고 한다. 41년에 '칼리굴라'가 암살당했을때 원로원에서는 제정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되돌리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암살당한 황제를 위한 법안을 건의하는 등의 행보를 보여 황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였고, 이로 인해 더욱 황가에 의해 중용된 것 같다. 이후 황가에 의해 '게르마니아'에 있는 로마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는 등 군사적, 행정적 경험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고, 52년에는 집정관에 취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특혜가 좋지만은 않았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에게도 총애를 받았지만,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복귀했을때, 네로의 초청을 받아 그리스 별궁에서 벌어진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황제가 직접 낭독하는 시를 들으면서 졸았다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지역에서 유대교 민족주이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유대 독립에 대한 움직임이 확대되자, 다시 공직에 복귀하여 시리아 속주로 파견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군단을 지휘하여 유대지역의 갈릴리 땅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요셉은 후에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로마로 가서 로마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되어, 로마와 유대간의 중간자 역할을 하며 양쪽이 상생할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네 명의 황제의 해

68년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후 원로원과 근위대가 돌아서면서 궁지에 몰린 네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로마에서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에는 라인강 지역의 로마 군단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 지휘관인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로마에서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비텔리우스가 게르마니아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남하하면서 본격적으로 내전이 벌어졌고, 다뉴브 강 방면의 로마 군단이 살비우스 오토를 지지하였지만, 결국 살비우스 오토는 게르마니아 군단에 패배하였고, 비텔리우스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텔리우스는 실언과 실정으로 민심을 잃었고, 제대로 된 내란 수습을 하지 못하였으며, 내란의 적이었던 다뉴브 강 방면의 군단 병사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림으로 불만을 사게되었다. 이에 다뉴브 강 방면의 로마 병사들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무키아누스는 이를 사양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아직 유대 지역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동방에 남아서 유대 지역을 수습하고,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모아 로마로 향했다. 무키아누스가 로마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다뉴브 강 방면의 로마 군단도 로마를 향해 출정하였다. 비텔리우스의 게르마니아 군단이 다뉴브 강 군단과 맞붙었는데, '베드리아쿰 전투' 패배하면서 비텔리우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비텔리우스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서둘러 황제 퇴위를 선언하는 등 조치를 하였지만, 퇴위는 로마 시민들과 비텔리우스를 추대한 병사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병사들은 이에 더해 로마시를 관리하는 장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을 살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결국 비텔리우스는 로마에 진입한 다뉴브 강 군단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참혹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가 살해당한 이후에 로마에 도착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보다 더 나중에 로마에 도착해서 정식으로 황제로 승인되었다. 이 혼란기 동안 로마에는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 해를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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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과 황권 강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가 유대 지역의 반란 진압 책임자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정통성이 없는 자신도 기존의 황제들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할 수 있도록 '베스파시나우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들인 티투스와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리고, 제위계승법을 만들어 당시 애매하게 사용되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등의 칭호에 따른 직위를 보다 명확히 규정했다. 이로서 소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불리우는 로마 첫번째 왕조는 막을 내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개막하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원로원 의원으로 원로원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과는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원로원이 명목상 가지고 있었던 황제탄핵권을 부정하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일대에서 새로원 원로원 의원들을 충원하는 등 원로원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에 힘썼다. 그 외에도 아들인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히고, 티투스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등 황제의 자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도모하였다. 또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집권기와 그 이후에 벌어진 혼란기 동안 비어버린 국고를 체우고 내정을 안정 시키기 위한 재무행정 분야의 개혁을 주도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개혁 때문에 많은 로마 시민들에게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충당한 재정으로 75년에는 유명한 로마의 '콜로세움'의 건설을 시작하는 등 공공건축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콜로세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투기장'으로 설립자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름에서 따왔다.

사망과 후계자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지 10년만인 79년에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는 유머 감각으로도 유명하였는데, 죽기 직전에도 신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있겠다고 하며 선체로 죽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역대 황제들은 사후에 신으로 승격되었기는 하지만, 자신의 죽음조차 유머로 승화시킨 황제는 매우 드믈 것이다. 내란에 편승하여 즉위한 황제로서 정통성 없이 권력을 잡게되기는 하였으나, 로마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로마 시민들은 정통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 같다. 집권기 동안 권력안정을 위해 노력한 것도 있어, 황제의 자리는 별다른 사고 없이 아들인 티투스가 물려 받았다. 사실상 명맥이 끊긴 '아우구스투스'의 가계 이후로 황제의 자리를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 이후 로마 제국에서는 정통성보다는 실력 위주의 여러 황제들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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