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11대 황제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 역사
- 2023. 5. 2.
황제의 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는 51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아누스)는 이때 이미 황가에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이듬해에는 집정관에 취임할 정도 였기 때문에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와 다르게 태어날때부터 로마의 상류층의 자녀로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덕에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나 형과 다르게 로마 군단에 입대하지 않아서 군사적 경험을 쌓은 적이 없다. 대신 '네로' 황제가 죽고나서 벌어진 로마의 혼란기에 로마에 있었는데,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대적하였을때, 목숨을 위협받았기 때문에 밤새 유피테르 신전에 숨어있다가 변장을 하고 로마를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비텔리우스가 죽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면서, '카이사르'의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었으며, 로마를 관할하는 법무관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다음에 황제가 될 후계자는 형인 티투스였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가 가진 권한보다 적은 권한만 가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에게 상당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티투스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시절부터 계속해서 집정관을 지내면 많은 공직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티투스의 후계자로서 국정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티투스의 집권기간 동안 로마에서는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하는 등 재해와 재난이 끊이지 않았고, 티투스는 집권 2년 만에 열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투스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서 인기가 좋았는데 이 때문에 일찍 요절한 티투스의 죽음에 도미티아누스가 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81년 도미티아누스는 근위대의 지지를 받아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원로원의 미움을 받은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 후에 자신의 집권기에 완공된 콜로세움을 포함하여 여러 공공 건축물의 개보수를 진행하였고, 로마 군단 병사들의 월급을 인상하였으며, 빈민 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로마 시민들과 군단의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또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방벽을 건설하여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원로원과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에 출석할때 개선식에서 입는 복장을 입거나, 원로원에서 자신을 지칭할때 '주인이자 신'으로 부르게 하는 등 원로원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강압적으로 대하였다. 또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귀족 출신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공석을 주로 그리스나 동방의 부유층들로 체웠기 때문에, 소외된 속주 출신이나 귀족 출신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하고 공공도덕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일부 로마의 귀족과 상류층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불법적인 행위들을 단호히 금지시키고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85년에는 아예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들과 공직에 있는 관료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본인은 공공연하게 많은 첩을 두거나 큰 돈을 들여 호화로운 별장을 건설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더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는데 실제로 도미티아누스는 효율적인 재정 활용을 통해 많은 금액을 국고에 편입시킬 수 있었고, 이는 사실상 도미티아누스 전후의 역대 황제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적인 실패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대적으로 시행했던 '브리타니아'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그 원인이 되었던 다뉴브 강에서 벌어진 '다키아족'과의 전쟁에서도 애를 먹었다. 89년에는 '게르마니아' 군단 지휘관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이후로도 원로원 의원들이 반역죄로 고발당하는 등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암살과 사후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지 15년이 되는 96년에 황궁에서 암살당하였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이 있는데, 그의 사후에 원로원이 기록말살형에 처해버렸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스테파누스'와 '파르테니스' 등 노예와 해방노예로 구성된 시종들에 의해 살해 당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는 미리 자신이 암살 당할 것 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체포하고 심문하였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자신의 하인들에게 암살당한 것을 보면 큰 관련은 없어 보인다. 또 이 암살에 근위대장들과 황후가 가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암살 실행범들에 비추어 보면 원로원이 계획했을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의문이 깊어질 뿐이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평소에 그를 미워하던,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기록말살형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당시 66세였던 원로원 의원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지명하였다.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을 무시하기는 했지만 아직 원로원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말상형에도 불구하고 콜로세움의 건설자로 도미티아누스의 이름이 쓰여진 명판은 로마 시민들이 지켜냈으며, 원로원은 암살범에 대한 처벌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했던 로마 군단의 병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처형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왕조'는 3대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