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명장, 이탈리아의 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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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켈루스

로마 공화정의 마르켈루스

고대 로마를 유지하던 구성원 중에는 몇몇 유력한 귀족 가문이 있었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방패'라고 불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속한 파비우스 가문, 한니발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낳았던 스키피오 가문, '삼니움 전쟁'중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여 전쟁에 공헌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있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등이 있는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그중에 클라우디우스 가문이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고대 로마 초창기부터 내려온 전통 있는 명문 귀족으로 로마 제국에서도 여러 황제를 배출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인물들은 귀족적이고 고집이 세며, 강인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평가받았는데, 마르켈루스는 그중에서도 특히 용감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소에는 온화한 성품을 보이며, 다른 로마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문화를 탐미했다고 한다. 마르켈루스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데, 그때의 공적으로 '아이딜리스'(안찰관)에 당선되어 공직을 수행했다. 안찰관은 당시 로마의 공직 중에 3번째로 중요한 직책으로 선거를 통해서 당선되었다고 하니, 당시 마르켈루스는 상당히 유망한 인재였을 것이다. 그 후 '프라이토르'(법무관)에 당선하며 순조로운 공직생활을 보낸 것 같다. 기원전 222년에는 집정관에 취임하여 갈리아 원정에도 참전하고 있다.

제2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쳐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일명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지금도 대단한 전술가로 평가받는 한니발에게 당시 로마 군단은 속수무책으로 유린 당했다. 특히 '칸나이 전투'에서는 대규모로 군단을 편성해서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로마 군단은 한니발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여 괴멸적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비롯하여 상당한 숫자의 로마의 지휘관들이 전사했을 정도로 참패했다. 그 후 로마는 후에 이탈리아의 방패라고 칭해진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술을 채용하여, 한니발과의 전면전투는 피하면서 끊임없이 견제하고 괴롭히는 지구전법을 구사하였다. 한니발은 부대의 병력의 문제와 로마 군단의 견제 때문에 직접 로마를 공략하는 것을 포기하고, 로마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포섭하여 로마의 영향권의 붕괴를 노렸기 때문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용맹한 마르켈루스는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을 채택했는데, 전면전투를 피하면서 쫓아다니면서 견제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규모 전투를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식으로 한니발의 병력 소모를 부추겼다. 그의 적극적이고 과감한 전술로 인해 마르켈루스는 후에 '이탈리아의 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비록 작은 승리였지만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을 상대로 '1차 놀라 공방전'에서 우세를 점하기도 했다.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동안 한니발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만을 들어온 로마 시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에도 마르켈루스의 집요한 추격을 계속되었는데,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카르타고나 '히스파니아'의 본거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전투는 피하고 최대한 소모를 줄이고 있었고, 로마에서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켈루스가 서로 교대하면서 한쪽이 한니발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쪽은 로마에서 이탈한 도시들을 공격해서 되찾아 오는 등 꾸준히 이탈리아 내부에서 한니발의 영향력을 지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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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공방전

기원전 215년에 로마의 굳건한 동맹으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히에론 2세'가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시라쿠사는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로마에서는 시칠리아의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마르켈루스를 파견하였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로마 군단은 시라쿠사를 포위하고 육지와 바다에서 시라쿠사를 공략하였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는데, 당시 시라쿠사에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있었는데, 그가 고안한 갖가지 신무기에 의해 로마 군단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시라쿠사 공략을 위해 고심하던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시민들이 '아르테미스 축제'여는데, 그 기간 동안 먹고, 마시고, 놀기 때문에 방심할 것이라고 여기고, 이때 공격하기로 하였다. 시라쿠사 시민들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축제를 즐기며 만취하였고, 그 틈을 노려서 공격한 로마 군단에 의해 시라쿠사는 함락되게 된다.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모래판에 원을 그려놓고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누군지 몰랐던 로마 병사에게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계속된 견제와 죽음

시라쿠사에서 돌아온 마르켈루스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한니발을 쫒아다니는 생활로 돌아왔다. 한니발은 계속 이탈리아 반도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고 로마에서는 각지에서 군단을 움직이며 로마의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다.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 군단에 패배를 안겨 주었지만, 이어지는 '카누시움 전투'나 '누미스트로 전투'에서 마르켈루스는 분전하여 명확한 승패 없는 상태로 전투를 끌며 한니발을 계속 소모시키려고 하였다. '2차 탈렌툼 공방전'에서 로마가 탈렌툼을 탈환하자 한니발의 영향력을 계속 위협받았고, '페테리아 전투'에서 로마 군단을 다시 격퇴한 한니발은 '로크리'를 구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때 마르켈루스는 '베누시아'에서 한니발을 견제하기 위해 정찰을 하고 있었는데, 한니발이 정찰대를 견제하기 위해 보낸 '누미디아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전투에서 이기면서 끝을 맺었기 때문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주목이 쏠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많은 로마 군단의 노력으로 한니발이 로마에 결정적인 일격을 하지 못하고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검과 이탈리아의 방패, 그리고 전투에서 쓰러진 수많은 로마 군단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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