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 「칸나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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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시칠리아' 섬에서 시작된 작은 분쟁이 당시 북아프리카를 근거지로 한 대국인 '카르타고'와 막 이탈리아 반도를 석권한 떠오르는 강자였던 로마의 대결로 번진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부터 22년이 지나, 기원전 219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다시 한번 누가 진짜 강자인지 겨루게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가 전쟁의 시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동안 사실상 로마와 한니발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흐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카르타고는 본국인 북아프리카 지역뿐만 아니라 '히스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한니발 바르카를 위시로 한 바르카 가문이 히스파니아 지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로마의 친구를 자청하고 있던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사실상 시작되었는데, 그가 사군툼을 공격한 이유가,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의 구적을 토벌하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카르타고의 지중해 패권을 다시 공고히 하기 위해 라이벌인 로마를 공격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히스파니아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 공격했던 사군툼이 마침 로마의 영향력 안에 있던 도시였을 뿐인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고대 유럽의 역사가 다시 한번 크게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니발은 부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벗어나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로마에서는 군단을 편성하여 두 군데로 보내 카르타고를 견제하였는데, 하나는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로 보내 한니발의 본대를 상대하고 상황에 따라 히스파니아를 제압하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시칠리아로 보내 카르타고 본국에서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혹독한 겨울의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로마 군단은 곧 한니발을 쫓아가서 그와 대결하였지만 '티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어진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로마는 한니발이 로마의 중대한 위기임을 감지하고 32년 만에 독재관을 임명하여 그를 상대하게 했다. 그러나 독재관으로 임명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과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를 견제하면서 그가 없는 곳에서 로마를 수복하는 '파비우스 전술'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방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켰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로마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는 동맹 도시들이 늘어났고, 평민들의 농장이 습격당하는 등의 피해도 많았다. 게다가 당당히 싸움에 임하는 로마의 전통까지 내세우며, 로마 시민들은 한니발을 대대적이고 압도적인 로마의 힘으로 굴복시키기를 원했다.

로마의 대규모 군단 편성

로마 시민들은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길어지는 것을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소극적인 태도가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216년 이런 불만이 폭발하는 상황에서 평민출신으로 인기가 있었던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자, 원로원에서도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한 명의 집정관에게 각각 4개의 군단씩을 맡기기로 결정하여 무려 86,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단을 편성하였다. 타렌티우스 바로는 같이 취임한 집정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 출진하였다. 당시 한니발의 부대는 약 5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에서 데려온 부대와 로마의 동맹에서 이탈한 도시의 지원이나 갈리아족 용병 등을 포함한 수치이다. 장비의 차이가 현격하지 않은 고대에 이 정도의 전력차를 상대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한 명이 1.7명을 상대해야 하는 꼴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단순히 숫자만으로 압도할 생각이 아니었다. 로마는 새로 편성한 군단이 충분한 훈련을 통해 준비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는데, 신임 집정관이 취임한 후 약 7개월에 걸쳐 싸움을 금지하며 훈련에 만전을 다하였다. 하물며 전에 있었던 전투에서의 패인을 분석하여 대비하였으며, 그에 따라 전장을 결정한 것도 한니발이 아닌 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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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패배

칸나이 전투1

그날 로마 군단의 총지휘는 타렌티우스 바로가 맡았다. 먼저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1만 명을 남겨두었는데 상황에 따라 후속대로 쓰려고 했던 것 같다. 로마 군단은 강과 숲 사이에 있는 평야 지형을 이용하여 주력인 중장보병을 이용하여 완전히 압도하려고 한 것 같은데, 중장보병을 가운데 배치하고 선두에 경장보병, 그리고 좌우에 로마 기병과 동맹군 기병을 배치했다. 각 보병대의 전열을 조밀하게 하여 두텁게 배치함으로 힘과 숫자로 중앙을 돌파하여 적의 진형을 쪼개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당시 그리스의 팔랑크스나 로마의 레기온의 중장보병의 밀집전술은 평야지역에서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니발의 카르타고군도 기본적인 포진은 로마와 동일하게 중앙에 경장보병과 중장보병을 세우고 양 옆에 기병대를 세웠는데, 부대를 활처럼 휘게 배치하여 뒤에 간격을 둠으로 부대가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로마의 전력을 받는 큰 피해가 예상되는 중앙에는 갈리아 보병과 히스파니아 보병을 배치하고, 양쪽 외각에 숙련된 카르타고 보병을 배치하여, 중앙에서 버티고 양쪽 외각에서 두들기는 형태가 되게 하였다. 또 우익에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하고 좌익에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기병을 배치하였는데, 전체 병력 숫자에서는 한니발이 불리하였지만 기병의 숫자는 더 많았다.

칸나이 전투2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 군단은 카르타고 전선의 중심을 공격하며 전진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 전선의 중앙에 있었던 갈리아와 에스파니아의 보병들은 뒤로 밀리면서도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카르타고의 기병들이 로마의 기병을 압도하고 멀리 쫓아내었다. 로마의 대군은 좁은 공간에서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은 정면은 매우 공격적이고 방어에도 효과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측면과 그리고 특히 후면에서의 공격에는 매우 취약하다. 게다가 밀집 대형이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쉽지 않고, 공간의 압박을 받을수록 서로서로가 방해가 되어 전투는 더욱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좌우에서 카르타고의 숙련병들이 공격하고, 우군의 기병을 내쫓은 적의 기병이 뒤로 돌아와 포위하기 시작하자 로마 군단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후방에서 공격당한 로마 군단은 패닉에 빠져 더 밀집하기 시작하였고,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아군끼리 밀고 밀리면서 압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완전히 포위당한 로마병들은 제대로 달아나지도 못하고 괴멸당하였고, 본진을 지키고 있던 1만 명의 병사들은 그대로 포로가 되었다. 총지휘관인 타렌티우스 바로는 퇴각하였으며, 같은 집정관이었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하였다. 중앙에서 지휘하던 전직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독재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도 전사하였으며, 군단의 지휘를 돕기 위해 참전하였던 원로원 의원들도 80명가량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원로원은 최대 규모 일 때도 3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하니, 로마로서는 사상 최악의 참패와 최악의 위기를 동시에 겪게 된 것이다. 로마 좌우의 기병대가 너무 빨리 무너지면서 지휘관에 해당하는 집정관이 한 명은 전사, 한 명은 퇴각하면서 지휘계통이 무너진 게 가장 큰 패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로마 군단의 사상자가 거의 6만 명에 달하는 것에 비해 한니발의 피해는 6000명 정도에 그쳤고, 그나마도 전선의 중앙에서 로마 정예군단을 상대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용병 부대였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패배

칸나이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예시라고 불리며, 현대의 사관학교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한다. 상대보다 많은 병력으로도 포위하여 이기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더 적은 병력으로도 한니발은 큰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패를 겪으면서도 로마는 침착하게 잘 버텨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반도 침공으로 로마와 로마의 영향력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패배할 때마다 그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계속했다. 이러한 대패에서 생각보다 많은 도시들이 로마의 동맹에서 이탈하지 않으며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후에 한번 한니발이 직접 로마로 진군하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로마 도시 공략을 포기한 상태에서, 로마는 재평가된 파비우스 전술을 꾸준히 구사하며 시간을 끌었고, 이윽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벌하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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