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읽는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의 프랑스 역사
- 역사
- 2022. 12. 19.
프랑스의 지리적 특징
프랑스의 남부는 지중해에 접해 있어 연평균 온도차가 크지 않은 소위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고 있으며, 서부는 난류인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도 있어 '서안 해양성 기후'로 분류된다. 고위도에 비해서 온난하며, 기본적으로 온대에 속한다. 프랑스의 위도는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홋카이도와 비슷한 정도의 위도에 속하지만, 해류 등의 영향으로 평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도 겨울에는 상당히 춥기 때문에 중세 무렵까지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모피 등의 방한용품이 필요했다.
선사 시대 프랑스(기원전 1세기까지)
프랑스는 유구한 역사의 나라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은 기원 1세기경까지는 역사의 표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프랑스가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공화정 로마 말기의 집정관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당시 프랑스의 지명)을 원정했을 때에 정리한 책이다. 동양의 고대사가 주로 중국의 문헌의 의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시대까지 세계사에 나오는 용어는 '라스코 동굴'의 벽화 정도이다. 라스코동굴은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동굴로 크로마뇽인의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벽화는 기원전 17000년에서 150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공화정의 로마와 로마 제국 시대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프랑스는 급속하게 로마화가 진행된다. 프랑스어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와 함께 '로망스어군'으로 '갈리아 로망스어군'에 속하며, 로마 제국의 속수가 되면서 유입된 로마의 정착자들과 동화되면서 '라틴족'으로 분류된다. 이웃나라인 영국이나 독일이 '게르만어파'의 '게르만족'이 중심이 되고 있는 점과는 대조적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프랑스의 역사에서 중요한데, 프랑스는 대두될 때마다 주변의 영국이나 독일과 대립하고 있다.
프랑크 왕국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은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면서부터 이다. 위에 프랑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라틴계의 민족이라고 말했지만, 프랑크 왕국의 건국자는 게르만 민족이다. 게르만족은 고대 로마 제국 무렵부터 용병으로 고용되고 있었지만, 몽골계 기마 민족인 '훈족'의 압박에 의해 유럽 지방으로의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된다. 375년에 시작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로 인해 이미 동서로 분열해 있던 로마 제국 중에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게 된다. 유럽에 침입한 게르만족은 여러 나라를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된 것이 바로 프랑크 왕국이다.
메로베우스 왕조
한마디로 게르만족이라고는 해도 다수의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481년에 '클로비스 1세'가 갈리아지역을 정복하여 수립한 왕국이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 왕국은 시기에 따라 '메로베우스 왕조'(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로 나뉘어 있으며, 481년부터 751년까지가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이다. 덧붙이자면 메로베우스라고 하는 것은 클로비스 1세의 할아버지의 이름인 '메로베우스 1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395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이 국교로 정한 이래 프랑스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는 주로 기독교이었기에, 지배계급이었으나 소수인 게르만족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인 라틴족을 지배하기 위해 496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정복자가 정복당한 민족에게 문화적으로 동화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서서히 지배영역을 넓혀나가서 현재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부르군트 왕국'(현재의 부르고뉴 지방)을 병합한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신장하는 가운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 세력이 대단한 기세로 세력을 확대해서 북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까지 진출해 있었는데, 이슬람 강국의 하나인 '우마이야 왕조'가 서남부 유럽으로 진출을 계속하면서 필연적으로 프랑크 왕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732년에 '투르 푸아티에 전투'가 발생하고, 이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이 승리하면서 결과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서유럽으로 진출하는 이슬람 세력을 저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이미 나라의 실권은 카롤링거의 '카를 마르텔'이 잡고 있어, 751년 카를 마르텔의 지위를 계승한 '피핀 3세'가 '로마 교황'과 제휴하여 메로베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성립하면서 메로베우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의 조력을 구한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이전보다 더 로마 가톨릭과 친화한 행보를 보인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상태에서 '동로마 제국'과 갈등 관계에 있던 로마 가톨릭세력에 위협이 되던 '랑고바르드 왕국'(롬바르드 왕국)을 754년에 공격하여 '라벤나 지방'을 빼앗아 그대로 로마 교황에게 헌납한다. 이것을 '피핀의 기증'이라고 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교황령'의 시초이다. 이러한 행보는 피핀의 아들인 '칼 1세'도 비슷한데,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작센 지방(독일 북부)과 스페인에 원정을 하여 그 판도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받으면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그리하여 칼 1세는 이름을 카롤루스(샤를마뉴)로 하고, '카롤루스 마그누스' 혹은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2가지의 큰 의미가 있는데, 프랑크 왕국이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권력을 이양받았다는 것과,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한 로마 가톨릭의 명분이 프랑크 왕국이라는 실질적인 권력과 융합하여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로 인해 로마 가톨릭은 중세 유럽에 있어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교회 세력이 크게 성장하게 된다. 또한 칼 대제가 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얻은 영향으로 프랑크 왕국의 계보를 이어받은 나라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덧붙여서 칼 대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트럼프 놀이의 '하트의 킹'의 모델로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롤랑의 노래'라고 하는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참고로 '칼'은 독일어식 읽는 방법으로, 프랑스어에서는 샤를이라고 읽는다. 그래서 카롤루스가 샤를마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칼 대제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프랑크 왕국이지만, 843년 '루이 1세' 시기에 '뵈르됭 조약'으로 3개국으로 분열하게 된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 왕국', '로타르 왕국', '동프랑크 왕국'의 3개로 분열해, 각각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기초가 되었다. 그 후에 다시 870년에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르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고 피서지로 유명한 프로방스 지방은 서프랑크 왕국에 이양되는 형태가 됩니다.
카페 왕조 시대
뵈르됭 조약에서 3 분할된 프랑크 왕국 중 서프랑크 왕국 지배 영역이 현재 프랑스 위치이다. 987년에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하고, 파리의 백작이었던 '웨그 카페'가 왕위에 앉으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된다. 카페 왕조의 시작은 매우 세력이 약하고, 영토도 파리 근교에 한정되어 있을 정도였으며, 12세기 후반까지는 1095년의 '클레르몽 공의회'에 의해 결정한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정도밖에 주목할 점이 없다.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7대 국왕인 '필리프 2세' 무렵부터인데, 이 시기인 1189년에 3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 무렵부터 프랑스는 영국과의 투쟁에 본격적이 되어,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가'와는 특히 격렬한 항쟁을 펼치게 된다. 필리프 2세는 영국 국왕인 사자심왕 '리차드 1세'와 그 동생인 '무지왕 존' 등을 상대로 전쟁하여 '노르망디'와 '아키텐'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 무렵의 영국 왕은 현재의 프랑스 국내에도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의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의 세력을 약체화시킨 명군이며,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최초로 위대한 왕이라고 하여 '존엄왕'이라는 별명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만 필리프 2세의 이혼 문제나 '알비 십자군'을 둘러싼 문제에 때문에 로마 교황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아비뇽 유수
그리고 1309년에 세계사적 대사건 '아비뇽 유수'가 일어난다. 원인은 '루이 9세' 때 참가한 7차와 8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생겨난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 필리프 4세가 국내의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실시한 것이다. 로마 교황 측은 당연히 반발했지만, 필리프 4세는 국내에서 프랑스 최초의 신분제 회의인 '삼부회'를 소집해 성직자들에게 과세하는 것을 강행한다. 이에 반발한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사이에 1303년 '아니니 사건'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보니파시오 8세의 매관이나 교황청의 부패 등을 규탄하고, 교황측은 이에 프랑스 국왕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갈등이 격화되자 프랑스 측은 이탈리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교황별궁이 있는 아니니에서 교황을 생포하여 모욕하였고, 그 후는 해방되었지만 신체적 상처와 정신적 고통으로 교황은 한 달 후에 사망하게 된다. 이미 십자군 원정 실패 등에 의해 로마 교회의 약체화가 진행된 상태에서 후대 교황에 프랑스 대주교 출신의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막강해진다. 그 후 1309년 필리프 4세의 요청에 의해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버린다. 이것을 고사에 비유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부르며 1377년까지 약 70년간 모두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건에 의해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과는 독립하는 형태가 되어, 프랑스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왕권이 교권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로 '갈리카니즘'(갈리아주의)라고 한다.
백년전쟁
이렇게 절정이라고도 생각되는 힘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카페 왕조이지만, 제15대 왕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카페 왕조는 본래 카페 가문의 후손이 계승하는 것이 법제화되고 있지만, 카페 왕조의 단절에 의해 4촌 형제였던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반발한 것이 바로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이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필리프 4세의 딸에 해당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것인데, 이로 인해서 100년 이상의 지속되는 소위 백년전쟁(1337~1453)이 발발하게 된다. 이 전쟁의 말기에 등장한 것이 '샤를 7세'시대에 등장한 '잔다르크'이다. 10대 소녀가 나라를 구한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매우 드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활약에 의해 그때까지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 쪽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인 잔다르크는 1430년 부르고뉴군에게 잡혀 영국에 넘겨졌으며 1431년 루앙에서 '마녀 재판' 끝에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백년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당연히 왕위 계승권 문제이지만, 그 내부에는 모직물의 문제가 있었다. 영국은 목축업이 발달해 있어 프랑스는 추위를 견디기 위한 양모를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모직물 공업의 중심이 '플랑드르 지방'(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에 걸친 지방으로 플란더스의 개로 유명하며 개전 당시에는 프랑스령)에 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로의 양모 수출을 중단하고, 플랑드르 지방의 반란을 유발하고, 궐기한 반란군이 플랑드르 백작을 추방한다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위 계승권 문제는 표면에 불과하고 유럽 대륙 내에 있는 영국의 영토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의 기나긴 다툼 끝에 그 영토의 소유권과 이권을 얻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