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위나라 사천왕의 한 사람 「하후연」
- 역사
- 2023. 10. 28.
조조의 친척
'하후연'(夏侯淵)은 중국 후한말인 삼국시대에 위나라에서 활약한 인물인데, 예주 패국 초현 사람으로 자는 '묘재'(妙才)를 썼다. 그는 위나라의 군주인 '조조'와 친척관계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냈던 것 같은데, 어릴 적 조조가 저지른 죄를 대신 받으려고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와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던 것으로 보이며, 후에 조조가 거병하자 '조인', '조홍', '하후돈' 등과 함께 진영에 합류하여 활약하였고, 이들 네 명은 조조 휘하에서 위나라의 사천왕 정도로 취급받게 된다. 하후연은 거병 당시에는 별부사마에 기도위를 지냈으며, 이내 진류 태수와 영천 태수를 지내는 등 조조 진영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지만, 최전방에서 활약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주로 후방의 안정과 보급 등을 책임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같은 군웅할거의 시대에 상관을 배신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이 때문에 조조도 거병할 때 대거 친족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하후돈에게는 복양, 조인에게는 광양을 맡기는 등 상당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조조와 '원소'가 하북의 패권을 놓고 '관도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하후연은 독군교위로 연주와 예주, 서주에서 군량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인지 하후연은 대체로 하후돈의 동생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보다는 정무를 보조하는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하후연은 하후돈의 친동생은 아니라고 한다.
진압과 토벌
배후자의 이미지처럼 하후연이 세운 군공도 전쟁의 전면에 나선 것보다는 주로 반란 진압이나 도적때 토벌 같은 일들이 더 많은데, 201년에는 '장료'와 함께 동해군에서 '창희'를 토벌하는 일을 맡았다. 창의는 본래 '장패' 등과 함께 작은 세력을 이끌고 '여포'를 도왔는데, 여포가 조조에게 패하면서 항복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비가 다시 서주를 장악하면서 다시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에게 붙었고, 이에 조조가 다시 하후연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하후연은 동해군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군량이 떨어져서 퇴각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장료가 나서 마지막으로 창의를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는데, 장료는 여포 휘하에 있었을 때 창의와 안면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창의는 206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는 '우금'과 장패가 먼저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후에 하후연이 합류하여서야 항복시킬 수 있었으며, 하후연은 이 공으로 전군교위로 임명되었다. 이후 황건적의 잔당인 '서화'와 '사마구'가 청주를 어지럽히자 '여건'과 함께 토벌에 성공하였으며, 209년에는 행령군으로 임명되어 여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뇌서'를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 정서호군으로 '서황'과 함께 태원의 도적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등 일면 소소해 보일 수도 있는 업적이 주를 이룬다.
동관 전투와 관중 평정
211년 조조는 '종요'와 하후연 등에게 한중을 장악하고 있던 '장로'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엉뚱하게도 관서 지역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마초'와 '한수' 등이 자극을 받아 선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 '동관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때 하후연은 위남에서 이들과 싸웠으며, 서황, '주령'과 함께 유미와 견에서 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안정에서 조조와 합류하여 '양추'를 항복시켰는데, 212년 난이 일단락되자 조조는 업으로 돌아가면서 하후연을 호군장군으로 삼아 '장합'과 서황, 주령, '노초' 등을 함께 장안에 남겨 장안에 남아 관중 장악을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후 하후연은 반란군의 잔당인 '양흥'을 잡아 처형하고 도적 '유웅'을 토벌하는 등 공을 세워 박창정후에 봉해졌으나, 마초가 기성에서 양주자사 '위강'을 공격했을 때 지원이 늦어 위강이 죽었으며, 마초가 그대로 200여 리나 요격을 나왔기 때문에 하후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마초는 위강의 부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기성에서 축출되었으며, 한중의 장로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게 된다. 214년 마초는 재기에 성공하였는데, 그는 강족과 저족 등 이민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쳐들어와 기산을 포위하였고, 이에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가 하후연에게 닿았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먼저 조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구원을 주저하였는데, 하후연은 조조가 너무 멀리 있어 시일이 오래 걸린다며 먼저 장합에게 군사를 주어 선두에 서게 하고 자신은 후미에서 군량을 관리하여 따랐다고 한다. 이는 이전에 구원이 늦어 위강이 죽게 된 것에서 교훈을 얻은 행동으로 보이는데, 마초도 구원이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막상 장합의 군대가 도착하자 전투를 포기하고 그대로 퇴각하였다. 마초를 완전히 쫓아낸 하후연은 다음으로 한수를 노렸는데, 한수는 하후연의 군대가 오자 약양성으로 달아나 농성하였다. 군대가 약양성 근처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이대로 약양성의 한수를 치던가, 흥국성의 저족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는데, 하후연은 공성전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에 있는 강족의 마을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는 한수의 세력의 근간을 이루는 강족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모습을 본 약양성의 강족들이 자신들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려고 하였고, 결국 한수는 군대를 이끌고 성을 나와 하후연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때도 많은 장수들은 한수의 군대가 숫자가 많은 것을 보고 진채를 세우고 참호를 파 큰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는데, 하후연은 그리하면 먼 길을 행군한 병사들이 지칠 것이라며 적들은 쉬운 상대라고 독려하여 그대로 전투를 속행해 크게 승리할 수 있었으며, 이 모습을 본 저족들은 흥국성이 포위되자 대부분 항복하였다. 또 하수평안왕을 자칭하고 있던 '송건'을 무찌르는 등 일대의 강족들까지 모두 제압하고 관중을 평정시켰다. 이 시기 관중 일대에서는 하후연의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조조는 강족과 흉노족들을 접견할 때마다 하후연을 대동하여 그들을 겁먹게 하였다고 한다.
한중 공방전과 최후
하후연은 이렇게 큰 공을 세워 정서장군에 임명되었고 한중의 수비를 맡게 되었는데, 그는 전투를 벌이면 항상 개개인의 용맹과 기세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조조도 이를 우려하여 경계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그러한 성향 때문에 지략이 모자라다는 뜻으로 '백지장군'이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이는 비단 장수들 사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병사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후연은 결국 자신의 이러한 결점을 극복하지 못해 최후를 맞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데, 218년 '유비'가 본격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북진을 시작하면서 '한중 공방전'이 막을 열게 된다. 한중 공방전의 초기에 유비 휘하의 명장인 '장비', 마초, '오란', '뇌동' 등이 여러 방면에서 공격해 왔지만, 조홍과 '조휴', 장합, 서황 등의 활약으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유비가 양평관에 자리 잡으면서 서로 견제하는 상태로 시간만 지나가게 된다. 그 사이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 도착하였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후연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장안에 눌러앉게 된다. 이듬해 유비는 전장을 '정군산'으로 옮겼고, 1만의 군대를 10개 부대로 편성하여 먼저 장합을 야습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하후연은 장합에게 동쪽을 맡기고 자신은 남쪽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연이은 공격으로 장합의 부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부대를 절반으로 나누어 지원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는 유비측의 계책이었는데, 연이은 기습과 화공으로 여력이 없었던 하후연에게는 어차피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황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병사수까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후연은 평소처럼 솔선수범하여 녹각을 보수하는 작업에 직접 병사들과 함께 나섰다고 한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비는 '황충'을 보내 이를 급습하도록 하였고, 결국 하후연은 난전 중에 전사하게 된다. 총사령관인 하후연이 전사하자 위나라의 군대는 한때 크게 흔들렸던 것 같은데, 곧 장합이 나서 지휘권을 회복하였고, 뒤늦게 조조가 장안에서 출발하여 합류하면서 조조와 유비가 직접 대결하게 된다. 하후연 사후 그의 시체는 조카딸이 되는 장비의 아내 '하후씨'가 묻어주었다고 하며, 조조는 안타까움을 담아 '민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