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중국의 이름난 효자, 24효의 일인 「왕상」

반응형

석상

효심이 대단한 왕상

'왕상'(王祥)은 중국의 '후한' 말기인 184년 경에 태어났는데, 서주 낭야국 극양현 사람으로 자는 '휴징'(休徴)을 썼다. 당시 후한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 해에는 '황건적'이 대대적으로 난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왕상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는데, 이후 아버지 '왕융'은 주씨와 재혼하였고, 이 계모 주씨는 왕상을 미워하여 항시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주씨는 왕상에게 외양간 청소를 시키는 등 궂은일을 하도록 시켰는데, 왕상은 이에 대해 아무런 불평 없이 시킨 일을 전부 맡아서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모를 극진히 모셔, 부모가 병이라도 들면 옷을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간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효자 왕상과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지극한 효심을 뜻하는 고사 '와빙구리'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주씨는 왕상에게 생선이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때는 이미 한겨울로 호수가 모두 얼어붙어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왕상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누워서 체온으로 얼음을 녹이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호수 표면이 갈라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단순한 우연 덕분인지, 왕상의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상은 무사히 물고기를 구해 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주씨가 왕상에게 참새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하였는데, 갑자기 집 안으로 참새떼가 날아드는 일이 있어, 주변 사람들이 왕상의 효심이 하늘을 감복시킨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또 주씨는 왕상을 괴롭히기 위해 집안에 있는 오얏나무의 열매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왕상은 비바람이 치는 날마다 나무를 붙들고 울면서 지켰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효자 왕상을 도운 것은 하늘뿐만은 아니었는데, 주씨의 친 자식인 왕상의 이복동생 '왕람'은 왕상이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그를 도왔으며, 후에 왕상이 결혼하여 그의 처까지 주씨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에는 왕람의 처도 달려가서 도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 덕분인지 주씨의 괴롭힘은 서서히 없어졌으나, 왕융이 죽은 후에 왕상이 명성을 얻게 되자 다시 질투심이 생겼는데, 주씨는 아예 왕상을 죽여 없앨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왕상에게 독을 먹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왕람이 이를 눈치채고 대신 마시려고 하였고, 왕상도 전모를 알고 주지 않으려고 옥신각신 하자 주씨가 다시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왕람이 항상 왕상의 밥을 먼저 먹어보는 등의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주씨는 독살을 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였고, 대신 밤중에 왕상을 습격하였지만, 마침 왕상이 화장실에 가면서 빈 이불만 찌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돌아온 왕상이 찢어진 이불을 보고 이를 눈치채었고, 스스로 주씨 앞에 나서서 죽음을 청하자, 주씨가 자신의 죄를 뉘우쳐 그 후로는 왕상을 자신의 친 자식처럼 대했다고 한다.

반응형

관직 생활

왕상의 집안은 후한말 혼란스러운 시기에 형주자사였던 왕상의 백부 '왕예'가 '손견'에게 살해당하자, 여강으로 피신하여 30여 년 동안 계속 은거하며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동안 왕상은 명성을 듣고 찾아온 이들의 제의를 계속해서 거절하였는데, 60세가 가까이 돼서 서주자사 '여건'이 그를 초빙하였는데, 처음에 왕상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동생 왕람이 강하게 권하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건은 주의 일들을 모두 왕상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왕상이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주의 백성들이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이후 온의 현령이 되었다가, 계속 승진하여 대사농에 임명되었으며, 고귀향공 '조모'가 제위에 오를 때 공적을 인정받아 광록훈에 관내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당시 위나라는 사마씨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왕상은 조모가 시해당했을 때 사마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왕상은 이후로도 중용되었는데, 왕상은 삼공인 사공, 태위의 자리에 올랐으며, 시중을 겸직하면서 휴릉후에 봉해졌다.

낭야 왕씨

왕상은 '서진'이 개국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정에서 대우받았고, 태보의 칭호를 받아 '사마염'의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267년에 고령을 이유로 은퇴하였으며, 수릉공의 작위를 가지고 높은 지위와 녹봉을 받으며 여생을 누리다 이듬해인 268년에 89세로 사망하였다. 왕상의 효심이나 은거 생활에 대한 부분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와 같은 낭야 왕씨들은 후한시절부터 조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 같은데, 후한이 멸망한 이후로도 그 권세가 계속되어 사마씨의 동진에서도 권세를 누렸다. 낭야 왕씨에는 대표적으로 왕상을 비롯하여 왕예나 왕연, 왕도와 왕돈, 왕희지 등의 인물이 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