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시대 남송의 대표적인 간신 「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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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북송의 멸망

'진회'(秦檜)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1090년 북송 시절에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현령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1115년에 26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상당히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은 해에 만주에서는 금나라가 건국되었고, 이는 이후 송나라와 진회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 진회는 출세를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1126년 '정강의 변'으로 사실상 북송은 멸망하게 되었으며, 도군황제 '휘종'을 비롯하여 '흠종'과 신하들까지 모두 금나라에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때 금나라는 장악한 중원의 화북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장방창'을 황제로 하여 괴뢰국인 '위초'를 세우게 하였는데, 진회는 금나라 '태종' 면전에서 장방창은 나라가 멸망하는 때 술이나 마신 위인이라고 고하고, 중원의 황성은 '조씨' 뿐이라며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도 당시 주전론자로서 북송의 멸망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송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은 갖고 있었던 셈이다. 금나라의 태종은 한때 진회를 처형하려고 하였다고도 하지만, 금나라에서는 진회의 이러한 기개를 높이 샀는지, 포로로서 금나라로 끌려가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은 것 같고, '완안창'의 참모로 있다가 1130년 완안창이 초주를 공격할 때 감시병을 죽이고 탈출하여 남송으로 향했다고 한다. 남송의 황제 '고종'은 진회가 금나라를 탈출해 자신이 휘하로 돌아온 것이 상당히 기뻤는지, 진회가 돌아온 그날 그를 예부상서에 임명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재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주전파에서 주화파로

진회는 북송시절에 금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 이기는 했지만, 일단 금나라와 화친하여 시간을 벌고, 충분한 준비를 마친후에 전쟁을 해야 된다는 일종의 온건한 성향의 주전파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송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대책 없는 이들이 많이 있었고, 도교의 선술을 이용해서 금나라를 막으려는 등 무모한 짓을 벌이다가 멸망하게 된 것인데, 이러한 것을 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금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회는 남송에서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그의 변심으로 인해, 그가 사실은 금나라의 사주를 받은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하며, 이후 그의 행적이 금나라를 이롭게 한 면이 있다는 것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송나라는 이미 북송 말기부터 혼란이 계속되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이 때문에 '악비'를 비롯하여 '한세충', '장준', '유광세' 등이 이끄는 일종의 의용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남송 시기에 완연히 군벌로 자리 잡은 이들은 금나라를 토벌하고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전파에 속했다. 안 그래도 북송시기 반란을 일으켰던 지역이 많이 속해 있었던 남송의 민심은 흉흉했는데, 여기에 더해 그 반란 세력들을 억누르면서 동시에 금나라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던 군벌들 또한 언제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고종도 금나라의 토벌과 영토 회복보다는 당장 자신의 지위와 나라를 유지할 생각이 더 컸던 것 같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송의 충신이자 재능 있는 인물이었던 진회가 금나라를 탈출하여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주화파로 생각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주전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인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후로 진회는 한번 파면되기도 하였지만, 19년간이나 남송에서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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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의 죽음

당시 금나라와 남송은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전 시대에 수없이 있었던 화북과 강남의 싸움이나, 이후 벌어지게 되는 몽골과 남송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원의 화북과 강남은 그 풍토가 크게 달라 화북지방을 장악했다고 해서 강남을 정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강남 지방의 덥고 습한 기운 때문에 풍토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많은 남벌을 시행했던 장수들은 특히 이점에 신경을 쓰곤 했다. 이렇게 전쟁은 소모적이고 불안한 양상으로 계속되었는데, 특히 남송에서는 조정이 실질적인 통제권한을 갖고 있지 못한 군벌들의 움직임에도 촉각을 기울이며 불안해했다. 이에 진회는 악비나 한세충 같은 군벌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관군으로 끌어들였는데, 그중에서도 이전부터 관직에 있었던 장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한편으로 삼았다. 그러는 동안 1138년에는 금나라에서 사신이 도착했는데, 이때 휘종이 사망한 소식 등 금나라에 끌려간 황실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고종도 금나라와 화평할 생각을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이에 진회는 적극적으로 주전파 군벌들의 세력을 와해시키며 그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는데, 1142년에는 남송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악비를 잡아 처형시켰다. 이때 한세충이 이에 대해 진회에게 항의하였는데, 한세충이 진회에게 악비의 죄상이 무엇이냐고 묻자, 진회는 아마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로 얼버무렸다고 한다. 이후 악비가 죽자 한세충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은퇴하였고, 서호에서 은둔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해에 유광세도 사망하였기 때문에, 걸림돌이 사라진 진회는 금나라와의 화평교섭을 성공시킬 수 있었는데, 남송이 금나라의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많은 양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얻어낸 것은 휘종의 관과 고종의 친모인 위씨의 귀환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흠종이나 현숙황후 정씨 등도 금나라에 생존해 있었으나, 고종은 이들이 자신의 지위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들은 죽어서도 중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공포정치와 말로

남송은 당장 눈앞에 금나라의 위협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는데,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고종은 귀환한 어머니와 함께 연일 연회를 즐기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진회는 손에 쥔 실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여러 구실을 만들어내어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노력 덕분에 남송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금나라의 첩자라는 설이나, 희대의 간신이라는 설을 반박하기도 하지만, 진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된 남송에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이 꼭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진회는 남송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1155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사후에 신왕으로 추증되는 등 대우받았다. 고종은 진회가 죽자 경계를 풀고 그의 일파를 숙청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당시 진회가 황제의 자리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어찌 되었든 이후 진회의 일가는 고종이 퇴위하고 황제의 자리를 승계한 '효종'에 의해 조정에서 퇴출되었으며, 사후의 지위도 차츰 낮아서 왕작이 박탈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회가 죽인 악비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데 반해, 그를 죽인 진회는 악당으로 계속 평가가 박해졌고, 지금까지도 중국 사회에서 간신으로 비난받고 있다. 악비의 묘인 악왕묘에는 무릎을 꿇은 진회 부부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 동상에 침을 뱉거나 발로 차거나 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어, 그 때문에 동상이 부서져 800여 년간 12번이나 교체해야 됐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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