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시대 북송의 최고의 예술가 황제 휘종 「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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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의도되었으나, 의도치 않은 즉위

'조길'은 1082년 중국의 송나라에서 송나라 6번째 황제인 '신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길은 황제의 자리와는 사실상 인연이 없었는데, 그는 11번째 아들로 위로 형이 10명이나 있었으며, 실제로 1085년에 신종이 사망한 후에는 6번째 아들인 '철종'이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송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고 태평성대나 다름없는 시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요나라와 서하라는 송나라의 국력을 갉아먹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고, 신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왕안석' 등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조정은 오히려 개혁을 주장하는 '신법파'와 이에 반대하는 '구법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벌이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는 철종의 치하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때그때 실권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신법파가 구법파를 공격하거나, 구법파가 신법파를 공격하는 등 권력을 휘두르는 주체만 달라졌을 뿐 혼란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1100년에 25세의 나이로 후계자 없이 병사하면서 다음 황제를 누구로 세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여기서 '흠성헌숙황후'의 지지를 얻은 조길이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사실 당시 이미 신종의 아들들 중 많은 이들이 사망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더 적합한 후보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도 그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가 개입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조길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누군가의 의도대로 황제가 된 셈인 것이다.

풍류천자

조길은 황제가 되기 전에 고모가 되는 '촉국공주'의 집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 고모부가 되는 '왕선'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왕선은 '금기서화'에 능하고 문예적 기질이 뛰어났는데, 조길도 왕선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그를 잘 따랐고, 이 때문에 흠성헌숙황후가 조길을 황제로 지목할 때, 그가 잘생기고 말끔한 데다가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쓴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조길의 예술적 재능은 북송에서도 상당히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그는 '광초'라는 초서체에 능했으며, 아예 '수금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기도 하였다. 회화에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원체화를 완성하여 사람들은 그를 '풍류천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특히 산수화와 화조화에 능했는데, 대표적으로 '계산추색도'나 '도구도' 같은 작품이 남아있다. 또 음악에도 관심이 있어 당시 쇠퇴했던 아악을 정비하여 제례음악인 '대성아악'을 창시하였다고 하며, 이는 고려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는데, 도화박사원을 설립하여 궁중화원을 뽑아 진궁, 오악관, 용덕궁 등의 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희곡과 바둑, 축국 등을 즐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예술가적 기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왕선을 따라다니며 본격적으로 유흥을 즐기는 법을 배워 여색을 즐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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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암군

그러나 조길의 통치자적인 재능은 그 예술적 재능만큼은커녕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더해 기본적인 통치와 정무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즉위 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도사가 조길에게 도성 동북쪽에 지세를 높이면 자식을 많이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정말로 자식을 보게 되자 계속해서 흙산을 쌓아 연결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10여 리에 달하는 흙산을 만들고서는 예술적인 감각을 이용해 그곳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조길은 이 정원들을 장식하기 위해 기괴한 모양을 한 바위 '태호석'을 모아 오게 하였는데, 이 돌을 옮기기 위해 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운반에 방해되는 민가를 강제로 철거하거나 다리를 부숴버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많은 돌이나 화초, 나무 등을 대운하를 이용하여 옮기게 하였기 때문에, 이를 '화석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길의 성향을 이용하여 '채경'이나 환관인 '동관' 등이 실권을 잡았는데, 그들이 황제의 예술활동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증세를 거듭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예 대 놓고 사기를 치기도 하였는데, 토지를 측량할 때 사용하는 기준을 더 짧게 바꾸어 남는 토지를 몰수하거나 매매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토지들을 강제로 빼앗기도 하였다. 물론 많은 신하들이 이러한 폭거에 반대하였지만, 당시 조정의 실권은 조길에게 아부하거나 기화와 괴석들을 많이 모아 온 이들이 잡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육적'이라고 부르며 증오하였다고 한다. 특히나 지금까지 신법파와 구법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벌여왔던 것과는 다르게, 채경 등은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배척하여,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던 송나라의 조정은 더욱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그중에 1120년에 일어난 '방랍의 난'이 유명하며, 이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 '수호지'가 쓰이게 된다. 여담이지만 수호지의 주인공격인 '송강'은 당시 반란을 일으킨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설도 있고, 그와 이름이 같지만 실제로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역할을 한 다른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강의 변

송나라가 이렇게 몰락이 길을 걷는 사이 만주에서는 새로운 강자가 탄생하였는데, 1115년 여진족의 '완안 아골타'가 국호를 '대금'으로 하여 나라는 건국하였다. 송나라는 1120년에 금나라와 '해상의 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공격하려고, 빼앗겼던 '연운 16주'를 되찾아오려고 하였지만, 마침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군대를 보내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121년에 반란을 진압한 송나라는 군대를 보내 요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공격하였는데, 막상 쳐들어가서는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연운 16주를 온전히 차지하려 맺었던 해상의 맹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지만, 송나라는 연운 16주 중 남쪽의 6주만 차지할 수 있었고, 금나라는 연운 16주의 북쪽에서 약탈을 하거나 주민들을 금나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또 지원의 대가로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심각한 상태였던 송나라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결국 1125년 송나라는 편을 바꾸어 몰래 요나라의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금나라가 대대적으로 송나라로 쳐들어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자 조길은 퇴위하여 아들을 새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도군황제가 되어 남쪽으로 도망쳤는데, 사실상 아들인 '흠종'을 금나라에 재물로 바치고 보신을 꾀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때 조길은 흠종이 죽거나 금나라로 잡혀가면 자신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 사이 흠종은 금나라와 평화협상에 성공하였는데, 영토와 함께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였고, 아버지인 조길을 다시 수도 '개봉'으로 모셔왔다. 하지만 금나라에 지불한 막대한 배상금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 황실 친척들이나 사찰에서 재산을 각출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개봉으로 돌아온 조길은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해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사이 화친에 반대하던 신하들이 흠종을 부추겨 협상 내용을 이행하지 않기로 하였고, 결국 1126년 화가 난 금나라에 이해 개봉이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 조길은 흠종을 포함한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금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때 끌려간 황실 가족들은 멸시와 조롱을 당하며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9번째 아들인 '조구'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남송'을 건국하여 송나라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고, 조길은 계속 금나라에 잡혀있다가 1135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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