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시대 양귀비의 친척 오빠, 나라를 망친 간신 「양국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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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나라를 어지럽힌 가문 출신

'양국충'은 중국 당나라시대에 태어났는데, 산서성 예성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양조'였다. 그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어머니는 '장역지'의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장역지는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측근이자 애인으로, 측천무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무주'를 건국하던 시기에는 위세를 떨쳤지만, 705년 궁중 쿠데타로 무주가 멸망할 때 잡혀 처형되었다. 즉, 양국충은 장역지의 일로 인해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한 사회적 지탄까지는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양국충이 어렸을 때부터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술이나 도박에 빠져서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젊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군인으로 생활하였으며, 6촌 동생에 해당하는 '양옥환'은 당시 당나라 황제인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와 혼인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형벌이 연좌되는 경우가 적었던 것인지, 아니면 장역지의 처벌 당시 측천무후가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외가 친척이 되는 양씨 집안에까지 크게 화가 미치지는 않은 것 같다.

양귀비의 탄생

'양현염'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일을 하는 하급관리였는데, 슬하에 아들 없이 딸만 여럿 두었고, 그중에 양옥환도 있었다. 양옥환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촉주에서 살았으나, 양현염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후 낙양에서 하급관리 일을 하던 숙부 '양현교'의 슬하로 옮겨갔다고 한다. 당시 양옥환의 또 다른 친척인 '양신명'은 조정에서 감찰어사 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연회를 열어 조정 대신들이나 황실의 친척들을 초대하는 등 빈번히 교류하였고, 그 연회에 미인으로 소문난 양옥환도 종종 초대했다고 한다. 이렇게 당나라 사교계에 데뷔한 양옥환은 곧 그 미모로 황자인 이모를 매료시켰고, 이모의 어머니인 현종의 총애를 받던 '무혜비'의 적극적인 도움도 있어, 733년 양옥환은 16세의 나이로 이모와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737년에 무혜비가 사망하였는데, 이로 인해 현종이 우울해하자 환관 '고력사' 등 측근들이 황제를 달래기 위해 새로운 여자를 물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고력사는 현종의 며느리가 되는 양옥환을 주선하였고, 현종도 양옥환을 마음에 들어 하였기 때문에, 현종은 며느리를 아들에게서 뺏어 후궁으로 삼는 역사적인 일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세간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력사는 일단 양옥환을 데려다 도교 사원에 출가시켜 신분 세탁을 시켰고, 이후 시간을 좀 둔 후 745년에 다시 궁으로 데려왔는데, 이때 양옥환이 귀비로 책봉됐기 때문에 '양귀비'로 불리게 되었다. 양귀비는 신분상 황후가 될 수는 없었지만 현종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외척인 양씨 가문도 덕분에 득세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양귀비의 세 언니는 각각 한국, 괵국, 진국부인으로 봉해졌으며, 양국충도 이때 현종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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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충과 이임보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양국충도 신세가 피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감찰어사로 임명되었다가 이내 어사대부 '왕홍'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으며, 거기에 경조윤을 겸하였다. 또 당대의 유명한 간신인 '이임보', 환관 '고력사' 등과 이해가 일치하여, 정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세족'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양국충은 이임보와 함께 당나라의 조정을 양분하였는데, 현종은 외척인 양국충을 더 신임했던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임보가 조정을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국충은 점차 이임보의 세력을 조금씩 밀어내었고, 여기에 더해 이임보가 하는 일에 직접 훼방을 놓으며 입지를 약화시켰다. 751년에 당나라는 '남조'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양국충이 추천한 '선우향'이 익주자사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지만, 그는 대패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는 승전하였다는 허위보고까지 하였다. 이임보는 이를 기회로 여겨 현종에게 양국충의 능력을 칭찬하면서, 그를 검남절도사로 임명하여 직접 출병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임보는 이미 고령에 병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양국충은 출병을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752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이임보는 양국충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사실상 패배를 시인하게 된다. 그러나 양국충은 이임보의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으며,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도 의심되는데, 753년에는 이미 죽은 이임보를 모함하여 생전의 관직을 박탈하고 재산도 몰수하였다. 이임보 자신도 간신으로 당나라가 멸망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그래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긴 하나 나라를 위한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데 반해, 양국충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욕심에 눈이 멀어 나라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안녹산의 난과 최후

이임보가 죽고 혼자서 실권을 모두 손에 쥐게 된 양국충은 재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0여 개의 관직을 혼자서 독점하였다고 한다. 또 자신의 세력을 결성하여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는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으며, 관리를 임명할 때는 사적인 친분관계를 제일 중요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754년에 '이복'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다시 남조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또다시 대패하면서 당나라는 수년 사이에 약 20만 명의 병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양국충은 이 사실도 현종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시켰다고 한다. 또 당시 군사적으로 명성을 쌓으며 현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안녹산'을 견제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양국충은 계속해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현종에게 모함하였다고 한다. 당시 안녹산은 평로절도사, 범양절도사, 하동절도사를 겸하고 있어 당나라 전체 군대의 1/3 가량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반란을 획책하고 있긴 했었으나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양국충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경고하였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웬만한 충신이 아니면 충분히 반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한 상태이기는 했다. 결국 755년 양국충의 말대로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상당한 주변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고도 한다. 반란세력은 파죽지세로 낙양을 점령하였지만, 수도 장안으로 향하는 중 동관에서 '가서한'에게 막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상황이었음에도 양국충의 위인은 변함없었는데, 그는 가서한이 공을 세울까 두려워 계속해서 그를 모함하였고, 반대편에서는 이 참에 나라를 망치던 양국충을 축출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결국 현종은 양국충의 말을 듣고 가서한에게 동관을 나가 안녹산을 요격하게 하였고,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반란군 공격에 나선 가서한이 참패하면서 동관마저 무너지게 된다. 이후 현종은 양귀비와 양국충 등 측근들만 데리고 장안을 빠져나가 촉으로 도망쳤는데, 너무 급하게 떠나느라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며, 장안의 백성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이러한 불안한 상황에 병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양국충은 결국 이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다. 그럼에도 불만이 가라앉지 않아 현종은 양귀비에게도 자결을 명했다고 한다. 이로서 간신들은 사라졌지만 당나라의 몰락의 핵심 원인은 절도사 제도에 있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당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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