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지중해의 대해적 바바 오루츠 「오루츠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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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레스보스 섬의 형제들

'오루츠 레이스'는 1474년 경에 오스만 제국령인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 출신으로 1462년에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 '메흐메트 2세'가 레스보스를 점령하면서 이곳에 영지를 하사 받아 정착하였고, 현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차남 오루츠를 포함한 네 명의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오루츠와 그의 형제들은 레스보스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미틸리니'에서 성장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도자기 사업을 돕기 위해 선원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선원으로 일반적인 운송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하였지만, 기독교 세력과 대립하며 사략선을 운영하는 등 점차 해적화 되었다. 오루츠는 에게 해를 중심으로 선원 생활을 하면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등을 배우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갔지만, 도중에 로도스 섬을 장악하고 있던 '구호기사단'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이때 막내 동생 '일랴스 레이스'는 전사하였으며 본인은 구호기사단의 '보드룸 요새'로 끌려가 3년 동안이나 감금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루츠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동생인 '흐즈르 레이스'가 노력하였는데, 흐즈르는 기독교 상인을 보내 그의 몸값을 지불하려고 하였으나 오루츠가 거절했다고 하며, 이후 오루츠는 이집트로 팔려가서 노잡이 노예 생활을 하다가 선박이 폭풍에 휘말린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다. 또는 흐즈르가 3년간 함대를 모아 공격하여 오루츠를 구출했다고도 하는데, 만약 그랬다면 오스만 제국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그는 안탈리아의 총독이자 오스만 제국 왕자의 후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자 해적으로 활동한 것 같은데, 한동안 에게 해를 돌아다니며 구호기사단의 섬을 공격하는 등 복수와도 같은 행동을 하였지만, 이내 오스만 왕가 계승권 분쟁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면서 그와 함께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이탈리아 해안과 기독교 세력이 장악한 지중해의 섬들을 습격하는 등, 에게 해를 떠나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해적 활동을 벌이게 된다.

바바 오루츠

1503년부터 오루츠는 근거지를 튀니지 동부의 제르바 섬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흐즈르가 본격적으로 오루츠와 합류하였으며, 형제는 지중해 서부로 활동영역을 옮기게 되었다. 이듬해인 1504년 오루츠는 전리품의 3분의 1을 당시 튀니지를 지배하고 있던 '하프스 왕조'의 술탄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튀니지의 '라굴레타' 항구의 사용 허가를 얻었고,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엘바 섬 인근에서 교황 '율리오 2세'의 배를 공격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작은 소형 갤리선을 지휘하여 훨씬 큰 2척의 대형 갤리선을 성공적으로 나포하면서 그의 명성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506년에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이 배는 스페인의 군함 '카발레리아'로, 나포된 배에는 스페인 기사 60명과 380명의 군인들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정규 해군 이외에도 해적들을 후원하여 해군 대용으로 이용하였는데, 오루츠도 이러한 활동에 계속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여러 무슬림 해적들과 함께 이탈리나 서부와 남부 해안 등을 습격하여 약탈하였다. 또 레콩키스타 이후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불안정해진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으로 향했는데, 오루츠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들이 해협을 건너는 것을 도왔고, 이에 사람들이 존경을 담아 그를 '바바 오루츠'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 오루츠'라는 뜻으로 자신들을 도와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와전되어 기독교 세력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그를 '바르바로사'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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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의 장악한 해적

오루츠는 지중해에서 주로 스페인과 자주 충돌하였는데, 1510년에는 알제리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512년에는 스페인이 장악한 알제리의 베자이아 항 요새를 공격하였는데, 오루츠는 이때 부상으로 왼팔을 상실하였고, 대신 은색 보철장치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스페인의 군함, 상선, 영토를 공격하였으며, 알제리 지역을 스페인과 제노바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1516년에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알제의 수장이었던 '살림'이 오루츠의 세력을 끌어들여 스페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는데, 알제로 들어간 오루츠는 그대로 살림과 그 가족들을 죽이고 알제와 지젤을 장악한 후에 스스로 알제의 술탄이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알제리의 내륙지역을 공략하여 지위를 굳건히 하였으며, 스페인에서는 이듬해인 1517년에 살아남은 살림의 아들의 요청을 받고 알제로 함대를 보냈지만,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피폐한 상태에서 오루츠에게 패배하였고, 오루츠는 기세를 타고 다시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역을 습격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오루츠가 알제리 내륙 지역을 공격할 때, 그가 가진 '우르반 대포'는 막강한 화력으로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였지만 운송하기가 힘들었는데, 그는 사막을 건널 때 대포에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하는 선장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가 집권하였는데, 카를로스 1세는 알제리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오루츠를 견제하기 위해 '틀렘센'을 통치하고 있던 '아부 자얀'에게 그를 내륙에서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오루츠가 이를 미리 눈치채고 틀렘센을 선제공격하여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오루츠의 죽음과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

1518년 카를로스 1세는 오루츠의 토벌을 명했는데, 스스로 1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스페인군은 수천면의 베두인족과 합류하여 틀렘센으로 진격하였는데, 이때 오루츠의 병력은 6,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오루츠는 틀렘센에 농성하며 6개월 간이나 버텼지만 도중에 원주민들에게 배신당하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알제로 귀환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전사하였다. 오루츠는 한번 포위를 돌파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아직 적진에 아군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그 들을 구하려고 시도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오루츠는 틀렘센에서 사망하였지만, 동생 흐즈르는 알제에 남아 세력을 온존히 할 수 있었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알제리에서 스페인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흐즈르가 오루츠의 기반을 그대로 물려받아 이름을 날렸는데, 흐즈르가 바로 오스만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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