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8대 황제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 역사
- 2023. 4. 29.
로마 제국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휘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15년 로마에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베테리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십분 발휘하여 당대에 원로원에 편입된 신흥 귀족이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의 통치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황가와 조력자로서 가까이 지냈으며 이때 집정관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비텔리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미소년들로 구성된 티베리우스의 소년 군단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카프레이아 별궁'에서 황가의 자식들과 함께 교육 받기도 하였다. 비텔리우스는 아버지로부터 아첨하는 재주를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그들 부자는 '네로' 황제까지 이어지는 역대 황제들 사이에서 상당히 신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비텔리우스의 이러한 행실 때문에 그에대한 소문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비텔리우스는 48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61년에는 아프리카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68년에는 반란으로 인해 네로가 사망하고,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가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 갈바에 의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비텔리우스는 이때까지 별다른 군사적 경험을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게르마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단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갈바가 일부러 무능한 비텔리우스를 사령관으로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작 로마의 최전선 사령관으로 부임한 비텔리우스는 군단의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조정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반대로 군단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69년에 비텔리우스는 원래부터 갈바의 황제 즉위에 불만이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텔리우스의 황제 즉위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등의 속주에 주둔한 군단의 병사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황제 비텔리우스
그 사이 로마에서는 또 다시 사건이 터졌는데, 네로에 대한 반란의 주모자 중 한사람이자,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는데 한 몫했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갈바의 후계자 지정 문제로 불만을 품었고, 아예 근위대를 회유하여 갈바를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비텔리우스의 입장에서는 그저 상대해야할 대상이 갈바에서 살비우스 오토로 바뀐 정도의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게르마니아 군단은 로마를 향해 남하하였는데, 군단은 지휘경험이 풍부한 부하들이 이끌고 있었고, 정작 비텔리우스는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가며 환락과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다뉴브 강 주둔 로마 군단은 살비우스 오토에게 가세하였는데, 이후 벌어진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살비우스 오토는 다뉴브 강 주둔군이 합류하기 전에 게르마니아 군단에 도전하였고, 여기에서 대패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인해 비텔리우스는 별다른 고생도하지 않고 원로원에 의해 정식으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비텔리우스의 행동은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공식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는 안 좋은 행위를 계속 반복하였다. 먼저 살비우스 오토에게 가담하였던 다뉴브 강의 로마 군단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였는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일반 병사들은 크레모나 도시의 원형경기장을 건설하는데 투입하였다. 비록 다뉴브 강의 군단이 내란에서 패배하긴 하였지만, 이러한 처벌은 너무 가혹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반감을 사게되었다. 또 느긋하게 향락을 즐기며 로마에 도착하여서는 살비우스 오토측에서 공무를 수행한 가담자들에게 별다른 보복을 하지 않았으나, 근위대는 전부 해산시키고 자신의 휘하에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병사들을 차출하여 새로 편성하였다. 깔끔하지 못한 이러한 처사는 근위대 소속이었던 이탈리아 군단 병사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후 비텔리우스는 네로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찬양하고, 자신의 취미였던 폭식을 즐겼다. 그는 여러 로마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희귀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들을 즐겼는데, 일설에 의하면 집권하는 동안 당시 로마 제국의 20년치 세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돈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썼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금 과장되었겠지만, 이러한 행위를 하는 황제가 오래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 같이 생각된다.
몰락과 최후
비텔리우스가 로마에서 통치를 내팽게치고 그저 즐기고 있는 동안, 비텔리우스에 의해 모욕적인 처벌을 받은 다뉴브 강의 로마 군단의 분노는 사그러들 줄 몰랐다. 다뉴브 강의 군단은 당시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이 총 책임자였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뉴브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즉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였고, 다시 한번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의 부하가 지휘하는 게르마니아 군단과 싸우게 된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이어서 크레모나까지 쳐들어가서 자신들이 당한 치욕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하였다. 이 패배로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로 가서 퇴위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시민들의 항의와 거부로 인해 실패하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위를 이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비텔리우스를 따르던 병사들이 당시 로마 도시의 장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을 죽이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을 부태우는 등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무기력하게 지내던 비텔리우스는 로마를 벗어나서 '캄파니아'에 있는 별장으로 도주하려고 하였지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도중에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황궁의 모든 관료와 노예, 병사들은 도주하였기 때문에 황궁은 텅텅비어있었다고 한다. 결국 비텔리우스는 로마로 들이닥친 다뉴브 강 군단의 병사들에게 붙잡혔고, 치욕적인 모습으로 포로 로마노로 끌려나가 갖은 고문과 모욕을 당하고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갈바부터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까지 한 해에 4명이나 황제가 있었던 이 해를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