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지휘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역사
- 2023. 1. 14.
명문가 코르넬리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인 코르넬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후에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로 북아프리카에 있던 카르타고와 누미디아를 석권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존경을 담아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를 재패한 자)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 시절에는 성명의 가짓수가 많지 않고, 같은 이름의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데, 스키피오 가문만 하더라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3가지 이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도 있어서 인지 남들과 다른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칭호들이 붙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했을 때, 집정관으로서 '티키누스 전투'를 지휘했으며, 이후에는 그의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함께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니발의 근거지를 공략하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17세의 나이로 티키누스 전투에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다고 하는데, 그의 전략이 한니발과 비슷한 점을 보면 그때 전장에서 본 광경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티키누스 전투에서 부상당한 아버지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구조하여 전장을 빠져나갔다는 말도 있다. 그 후 기원전 213년에는 22세의 나이로 안찰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매우 어린 나이로 인해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인해 원로원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히스파니아 지역 점령
기원전 211년 한니발을 고립시키기 위해 그의 근거지였던 히스파니아 지역을 공략하던 스키피오 형제는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르발 바르카'의 계략에 빠져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비록 규율이 잘 잡힌 로마 군단의 패잔병들은 카르타고의 영향권 밖인 '에브로 강' 북쪽에 재집결하였지만 지휘관이 모두 전사하여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당시는 로마가 이미 한니발의 공격을 받은 지 8년이나 지나서, 뛰어난 지휘관들이 여러 군단에 편성되어 한니발을 견제하거나, 로마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로마를 배신한 도시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히스파니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법무관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급하게 히스파니아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원로원에서는 추가로 히스파니아에 보낼 로마 군단을 지휘할 사람을 찾았는데, 이제 막 안찰관을 시작한 지 2년 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입후보하였다. 그의 나이가 너무 젊었기 때문에 원로원에서는 주저하였는데, 당시 히스파니아의 불리한 전황으로 다른 입후보자가 없었고, 그의 젊은 패기와 뛰어난 언변으로 원로원은 결국 그의 취임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당시 로마가 처한 위기 사항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하였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특례이기도 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도착한 히스파니아 지역은 에브로 강 이남은 모두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전쟁동안 로마가 히스파니아에서 닦아놓은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히스파니아가 안정되어있으면 이탈리아 본국을 공략하는 한니발에게 지원이 집중될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이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생각한 곳이 바로 '카르타고 노바'였다. 카르타고 노바는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지역 수도 같은 도시였는데, 카르타고의 부대들은 모두 로마를 견제하면서 내부 도시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지휘를 받는 로마 군단은 배를 타고 카르타고 노바에 상륙작전을 시작하였다. 로마 군단은 상륙한 지 단 며칠 만에 도시를 점령했고, 이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다른 도시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카르타고 노바 주변 도시들은 로마 군단이 도착하면 저항 없이 항복하였고, 카르타고의 지휘관들은 주변 도시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로마 군단과 카르타고의 부대는 '바이쿨라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카르타고의 지휘관이었든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전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전투를 고집하지 않고 후퇴하였다. 그 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온전한 병력을 모아 바로 히스파니아를 빠져나가 한니발을 도우러 이탈리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직 히스파니아에는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 바르카'와 카르타고 본국에서 파견한 지원군을 지휘하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남아있었다. 로마 군단과 카르타고가 견제를 거듭하던 중 기원전 206년 본격적으로 히스파니아 지역의 주인을 결정하는 '일리파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일부 병력을 남겨 히스파니아 지역을 수비하게 한 후 로마로 귀환하였다.
한니발의 패배와 카르타고의 패배
기원정 20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29세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고,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원래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와 동맹하여 카르타고를 공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심각성을 느낀 카르타고에서 먼저 누미디아와 화친하여, 로마 군단은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동맹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당시 누미디아는 마사에실리 부족과 마실리 부족이 반목하고 있었는데, 카르타고는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와 손을 잡고 누미디아 전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밀려난 마실리 부족의 왕자였던 '마시니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로마 군단에 합류하였다. 이어진 '우티카 전투'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 군단은 누미디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마시니사를 왕으로 세우고, 카르타고를 압박하여 평화 협상에 돌입하였다. 이에 응한 카르타고는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모든 부대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수하고 본국으로 귀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막상 한니발이 귀환하자 카르타고는 그에게 병사를 주어 다시 로마와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한니발은 이 싸움에 회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회담을 제의하였다. 당시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수한 순간 이미 전쟁에서 진 것이나 다른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긴다 하더라도 이미 히스파니아 지역을 로마에 빼앗기고 누미디아도 로마로 돌아선 상태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할 여력이 부족하였다. '자마 전투'에서 전체 병력 숫자는 카르타고가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승자인 로마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영웅시하는 역사가들이 쓴 기존의 그의 전투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평가되는 만큼, 이 전투에서도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실제로 병사 수가 많았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는 전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카르타고가 한니발과 그의 정예부대 였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부대의 사기는 높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상대는 한니발의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였고, 한니발은 그와 한차례도 싸워 본 적이 없는 입장인 것이다. 자마 전투의 패배로 인해 한니발은 몰락하였고, 카르타고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승리하였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대대적인 개선식을 행했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 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운 엄청난 공을 바탕으로 겨우 37세의 나이에 로마 최고의 명예직인 감찰관을 지냈다. 그 후에도 집정관을 역임하는 등 원로원에서도 높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大카토)에게 정치적으로 견제를 심하게 당하였고, 여러 건의 고발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판 도중에 재판 참석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데리고 재판장을 이탈하였고, 이로 인해서 스스로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캄파니아' 지역의 소도시인 '리테르눔'으로 떠나서, 기원전 183년 54세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라이벌이었던 한니발도 같은 해에 죽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에서 쫓겨난 것을 원망해서, 죽은 후에도 가족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하고 리테르눔에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