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20대 황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역사
- 2023. 2. 19.
세베루스 왕조의 시작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의 북아프리카 속주인 '트리폴리타니아' 출신으로, 상당히 부유하였지만 로마의 정치계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집안 출신이다. 146년 태어난 그는 줄곧 북아프리카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속주의 유력자 가문 태생이었기 때문에, 속주에서도 상류층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8세가 되자 로마로 향했는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 집정관을 지낸 친척들의 후원을 받아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공직 생활은 평범했는데, 회계감사관과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을 지내면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와 '시칠리아' 등에서 총독을 역임하다가, 191년에 '판노니아'의 총독으로 취임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판노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있을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되면서 '다섯 황제의 해'가 시작되었다.
다섯 황제의 해
193년은 로마에 한해에 무려 다섯명의 황제가 있었던 해로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불리기도 한다. 콤모두스 황제를 암살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는,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서는 신속하게 '푸블리우스 헬리우스 페르티낙스'와 회담을 가졌다. 이후 페르티낙스가 폭군 콤모두스의 사망을 원로원에 알리고 황제로 추대되면서 로마는 혼란을 피해가는 듯 싶었다. 그러나 로마는 곧 다시 혼란에 휩쌓이게 되는데,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중심으로하는 근위대는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겨우 즉위 3개월 남짓한 황제를 다시 암살해버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병영에서 공공연히 황제의 자리를 경매로 부쳐,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에게 팔아치운다. 이러한 행위는 전 로마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는데, 먼저 근본적으로 근위대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황제로서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 많은 황제나 그 자리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신경 썼던 것과는 달리, 로마의 황제는 명분도 혈통도 아닌, 그저 그 자리를 쟁취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로마는 왕국 시절부터 능력있는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에 대해 당연시 해온 경향이 있다. 로마가 제국이 되면서 혈통이나 명분을 따지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역사는 반대방향으로 가게 되긴 하지만, 이것은 당시 로마가 가지고 있는 넓은 국토와 많은 상비군으로 인해 마치 '군웅할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곧 각지에서 황제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판노니아 속주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지 채 2주도 되지 않은 때였다. 이어서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인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마찬가지로 군단의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렇게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의 지휘관들이었던 이들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는데, 사실 병사들에 의해 추대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로마가 혼란한 상황에서 능력있는 야심가들이 잇따라 궐기한 것이다.
로마 제국의 내전과 4명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명의 경쟁자와의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그가 판노니아 속주에 있었기 때문에 위치상 로마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동쪽에서는 펜스켄니우스 니게르가 언제 로마로 진군할지 몰랐고, 자신이 근거지를 비운 사이에 북쪽에서 올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걱정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곧바로 '게르만족'과 대치하고 있던 라인 강 방면의 로마 군단들을 포섭하였는데, 당시 로마에서 가장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뛰어난 이들로 구성된 군단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이 되었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로마로 가기 위해 '갈리아' 지방에 상륙하였고, 그도 이 군단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군단을 선점 당한데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공동 황제로 취임시켜줄 것을 약속하면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로마행을 포기하고 근거지로 돌아가게 된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동방 지역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으는 한편 로마의 원로원에 자신이 황제로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은 중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측의 방해에 의해 전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의 황제 추대 소식까지는 막지 못하였고, 로마 시민들은 4명의 황제 중 유일하게 원로원에 의해 적법한 방법으로 황제로 추대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그를 공동 통치자로서 인정하고 로마로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요구에 대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펜스켄니우스 니게르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암살자를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처럼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형식으로 적법한 황제로서 로마에 입성하려고 했던 것 처럼 보이는데, 이는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추월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쟁자들을 충분히 견제해 놓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서둘러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도중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암살자를 보내거나, 공동 통치를 인정하겠다는 사절을 보내거나 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사건이 원흉인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근위대를 이용하여 로마를 요새화하고 농성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로마 군단을 정면으로 상대할 실력도 의지도 없었던 근위대는, 자신들의 잘못을 덮을 요량이었는지, 원로원과 함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황제의 자리에서 해임하고서는 끌고가서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자비를 얻지 못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로 입성하자 마자 암살당한 페르티낙스 황제를 복권시키고서는, 그의 후임을 자처하며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근위대를 도시밖으로 행군시킨 후 암살과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무력으로 로마를 장악한 그는 근위대를 자신의 휘하에 있던 자신에게 충실한 병사들로 새로 구성하고, 재정과 각종 기금을 장악하였으며, 고갈된 로마의 곡물창고를 채우고, 원로원을 회유하는 등 다음 단계를 위해 만전을 다 하였다.
동방 원정과 파르티아 전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는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이제 경쟁자는 펜스켄니우스 니게르 한명만이 남아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경쟁자를 압박하기 위해, 로마에 있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지만,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는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동방 일대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입지를 흔들기 위해 로마의 곡창지대였던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하였다. 이 싸움은 시작하기 전부터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에게 불리하였는데, 그가 동방에서의 영향력을 공공히하여 움직일 수 있었던 로마 군단은 6개 군단 정도 였으며, 외세인 파르티아에서도 지원을 받긴 하였으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당시 로마 최전선에 있던 최강의 군단을 16개 군단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힘의 차이는 둘 사이의 내전 구도로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동방에 있던 펜스켄니우스 니게르가 이집트를 공격하여, 로마에 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압박하고, 이에 동방으로 원정 군단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펜스켄니우스 니게르가 더 유리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궂이 이런 복잡한 구도를 취할 필요없이 로마로 진격했다고 해도, 명분상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었다. 또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더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방어를 굳건히 하면서 로마를 계속 장악한 채로 버텼다면, 역사상 보다 더 일찍 로마가 동과 서로 분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는 다음 계획이 있었고, 경쟁자를 빠르게 제거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근거지인 시리아 지역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요새화하고 충분히 대비하고 있던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의 군단에 대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군단은 초기에 고전한 것으로 보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군단은 '페린투스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니카이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년 '이소스' 평원에서 치루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둘의 싸움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는 패배 후 도망하였으나,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의 일가족을 모두 처형하였으며, 그의 지지자들도 잔인하게 처형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를 피해 파르티아로 도망갔다고 한다. 전쟁 도중에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공동 통치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내전 초기부터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분쟁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5년까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파르티아와 군사적 마찰을 빚었다.
로마의 유일한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에는 이제 두명의 황제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로마에 아직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공동 황제가 되는 것으로 동맹을 맺었지만, 그가 받은 것은 '카이사르'의 칭호 밖에는 없었다. 한명의 황제가 로마를 좌지우지하며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하고 있는 동안, 나머지 한명은 그저 황제의 명예만 받았을 뿐이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경쟁자인 펜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제거하자,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선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고 선포하였으며, 아들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개명하고, 카이사르의 칭호를 하사하여 황제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원로원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196년 이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사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다시 갈리아로 향하였다. 그는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후 '히스파니아' 지역에 있던 군단과 합류하였으며, 라인 방면의 로마 군단을 회유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루그두눔'(현재의 리옹)에 주둔하였다. 197년 양자의 군단이 루그두눔 외각에서 맞붙었다. 무려 15만명이 넘게 참전한 전투로 그 양상은 상당히 치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패배하였고, 그의 지지자들과 가족들 또한 펜스켄니우스 니게르의 때와 같이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이로서 모든 경쟁자를 배제하고 유일한 로마의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앉혔다. 그리고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전 황족들을 모두 찾아내서 죽였다. 이로서 로마에서 '세베루스 왕조'가 시작되게 된다. 사실상 로마내의 모든 무력을 장악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원로원은 그 이름만 있는 상태로 황제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는 기관이나 다름없어졌다. 또한 반대자나 위험인물들을 모두 숙청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세워놓은 후계구도를 흔들 수 있는 인물도 남지 않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통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인 출신이며, 동시에 군대를 이용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주요 공직에 군 출신 인물들이 많이 기용되었는데, 뿐만 아니라 법학자 출신들도 많이 발탁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로마법이 가장 꽃피운 법학자 시대라고도 하는데, 황제 자신은 그와 반대로 행동해서 자신의 정적들은 법을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이 떄문에 그를 공화정 시대에 무자비한 숙청으로 유명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빗대어 '푸닉 술라'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대적한 자들만을 숙청했기 때문에,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황제의 자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정통성도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재기능을 못하게 만들었고, 로마 시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의 인기를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병사들의 월급을 인상하고, 지휘관을 전문 군인들 위주로 임명하는 등 군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자신이 군인 출신인 것을 내세워서 인기를 유지했다. 때문에 로마 제국 내전의 원흉이 되었던 근위대장의 지위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상승하였다. 또 파르티아 원정을 계속하여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였으며,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공사업도 진행하여 로마 제국의 마지막 가도 건설 사업인 '세베리아나 가도'를 건설하였으며, '포로 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인 '세베루스 개선문'도 세웠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8년 당시 10세인 아들 바시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정하였다. 그에게는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라는 아들이 한명 더 있었는데, 두 아들은 서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208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직접 '칼레도니아'(현제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나섰다. 이때 이미 그는 고령으로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2년여에 걸친 원정은 황제의 건강에 별로 좋지 않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에게 제위를 넘기고 211년 사망하였다. 황제의 사망으로 로마의 칼레도니아 원정은 중단되었으며, 이후 로마는 두번다시 칼레도니아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