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하는 로마와 흔들리는 왕정, 6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역사
- 2022. 12. 18.
왕정 로마도 이미 말기가 됐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하지만 그 물은 원래 흐르던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 일본 고전인 '방장기'의 유명한 서두 부분에 있는데, 이것은 어떤 왕조에도 빗대어 말할 수 있지만, 특히나 로마가 앞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나아가 제정으로 변화하면서도 계속 로마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특히 더 어울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로마는 이미 목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서, 대국으로서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출신을 모르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재능을 간파한 타르퀴니우스의 혜안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그의 어머니가 '에트루리아'인으로 에트루리아의 도시에 살다가 로마와의 전쟁으로 함락되어 노예가 되어 로마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세르비우스는 선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비호를 받으며 왕궁에서 사는 게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위는 전승에 따라 재각각으로, 세르비우스가 어떠한 태생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를 상당히 좋게 평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두 가지 비극의 발단이 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타르퀴니우스가 사망하게 된 것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사위로 세르비우스를 선택했다. 세르비우스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고, 그가 차기 로마왕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에 반발한 것이 4대째 왕 '안쿠스'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차기 왕의 자리를 노리고 드디어 타르퀴니우스 암살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타르퀴니우스의 왕비는 곧 세르비우스를 불러 왕좌에 앉도록 진언한다. 이때 타르퀴니우스와 왕비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후계자로서는 사위를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승계가 후에 로마 왕국 전체를 휘말리게 하는 비극의 서막이 된다. 원로원의 승인을 얻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정식적으로 로마 왕국의 제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례적으로 평민회의 승인을 얻지 않은채 원로원의 동의만으로 왕의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지금까지 로마 왕국의 역대 왕들은 평화로운 절차로 취임하였지만, 이 시기부터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그 배경에는 로마의 경제적 발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로마 왕국은 왕좌에 앉는 것에 단순히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국으로 주변에 상당한 강대국들과 경쟁상대인 다른 소국들 속에서 국가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결코 편하지만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로마에는 권력과 부가 집중되지 시작했고, 그러한 배경의 변화에 의해 왕좌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되어 갔을 것이다. 한때 두 번째 왕 '누마'는 세 번이나 왕좌를 고사했는데 그 손자인 안쿠스의 아들들은 왕을 암살해서라도 그 자리를 원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질리지 않는 권력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수한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로마의 토대는 선왕 타르퀴니우스에 의해 이미 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를 벽으로 덮는 사업에 착수했다. 동양과 서양 도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벽에 있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기원후 7세기 무렵의 이야기이지만, 중국 최대의 도시 장안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유럽의 도시는 1만 명 이상 있으면 대규모였다고 한다. 동양의 경우 도시를 완전히 성벽으로 둘러싸는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의 도시는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성벽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 로마의 축조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아직도 '무라 세르비아네'(세르비우스의 성곽)라고 불리는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지금도 그 형태가 남아있는 것은 상당히 낭만스럽다. 세르비우스는 또한 군제를 개혁을 한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로마 시민권'이라는 것은 로마 영향권의 확장에 따라 장차 절대적인 브랜드를 자랑하게 되는데, 그 로마 시민권과 병역과 선거권을 연결한 것이 바로 세르비우스이다. 이는 그리스의 제도와도 비슷한데, "권리에는 의무를 수반한다"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나라는 스스로 지킨다"는 의식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데 원동력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로마가 강해져 가는 것도 시민으로서 공동체를 위한 책임 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병역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이기도 하게 된 것이다. 세르비우스는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인구조사 등을 실시했다. 이 조사에 있어서는 재산 등의 파악도 실시했다고 하며, 그에 따라 로마 시민을 6등급으로 나눴다고 한다. 또한 군략 자체도 정비했다. 로마군이라고 하면 중장 보병에 의한 '레기온'이 유명한데, 그것도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연전 연승하여, 그의 44년에 걸친 긴 통치는 그의 취임이 다소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평화롭게 이어졌다.
저물어가는 로마 왕국의 태양
로마는 가장 뛰어난 자가 왕이 된다. 로마에는 7명의 왕 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그 원칙이 통한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역사만 봐도 그렇지만, 권력 다툼은 나라를 쇠퇴시킨다. 세습제 왕조는 안정적인 왕권을 보장할 수 있지만 왕이 되는 인물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극명하게 갈린다. 로마의 역사도 왕정이나 제정을 거치지만 그 대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시대는 왕정 로마의 최전성기이지만, 이 직후 로마 왕국은 멸망하게 된다. 보통이라면 거기서 나라가 끝나는 것이지만, 로마는 드물게도 국가를 유지한 상태에서 정치 체제만 공화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로마 왕국은 역대 로마왕들이 왕좌에 앉는 그 방식부터 달랐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는 하다. 세르비우스의 정책 대부분은 전왕 타르퀴니우스의 것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훌륭하게 실현했다. 6대에 걸쳐 명군이 나오는 것은 세계사상에서도 드문 일이며, 이러한 로마의 방식이 로마가 역사상 최고가 된 비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