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을 괴롭힌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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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게르만족 로마 군단

'알라리크'는 370년에 게르만계 '서고트족'의 유력한 가문의 일원으로 다뉴브강 하류 지역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게르만족들은 동쪽의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로마 제국과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도 쇠퇴해 감에 따라 부족해지는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포이데라티'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족을 비정규 로마 군단으로 편입시키는 대신 제국의 영내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혼란이 있었지만, 379년 로마의 공동황제로 선포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지휘아래 서고트족은 '트라키아' 지역으로 이주 할 수 있었다. 알라리크도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였는데, 394년에 일어난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알라리크는 서고트족 2만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는 '반달족' 혼혈의 로마 지휘관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도 참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동과 서로 나뉘어 통치되었는데, 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각각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관리하게 되었다. 이때 스틸리코는 아직 어린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사실상 서로마 제국을 관리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서고트족의 왕

서고트족은 로마 영토 안으로 이주하여 병역에 종사하는 대신 지원금을 지급받았는데, 새로 황제가 된 아르카디우스는 지급을 정지하였다고 한다. 이에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고트족은 동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을 공격할 정도의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지역을 침공하여 약탈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의 주력은 '갈리아' 지역에서 있었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로마에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알라리크는 무방비한 그리스 일대의 도시들을 약탈하였고,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급히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동로마와 서로마가 완전히 분열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틸리코는 휘하의 주력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넘어와서 알라리크를 저지하였다. 이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완전히 격파하는데 실패하였는데, 이는 동로마측의 방해 때문이었다. 동로마에서는 알라리크를 완전히 격파한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 올것을 우려하였고,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서로마 소속의 스틸리코가 동로마의 영역을 침범한 것에 대해 비난하면서, 즉시 동로마 소속의 군단을 반환하고, 서로마 소속의 군단과 스틸리코는 동로마에서 떠나도록 요구하였다. 또 스틸리코의 동로마에서의 군단 지휘권을 박탈하면서, 사실상 동로마와 서로마의 균열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라리크는 이틈을 타고 다시 그리스 지역으로 진군하였고, 아테네, 아티카, 스파르타, 코린트 등의 그리스 주요 도시들을 약탈하면서 스스로를 정복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알라리크를 설득하기 위해서 아테네에서 사신들이 알라리크를 찾아왔는데, 알라리크는 그들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어로 반박하여 쫒아보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397년 보다못한 스틸리코가 다시 서로마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에 기습 상륙하여 알라리크를 포위하였다. 알라리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틸리코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서 알라리크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후 알라리크는 동로마 궁정과 협상하여, 공식적으로 '일리리쿰' 지역의 동로마 군단 지휘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일리리쿰 지역은 동로마와 서로마에 걸쳐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명목상 동로마의 지휘관인 알라리크가 명목상 동로마 군단을 이끌고 서로마를 공격하는 형세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로마와 서로마는 이때부터 되돌아 올 수 없는 분열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다.

로마 약탈

401년 충분한 준비를 마친 알라리크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동맹을 맺고, '라이티아' 지역에서 분란을 일으키게 하여 스틸리코를 유인하게 하였다. 이후 알라리크는 방비가 느슨해진 이탈리아 북부지역으로 침공하였고, 서로마 수도인 '메디올라눔'까지 위협하였다. 그러자 스틸리코는 신속하게 라이티아 지역을 진압하고,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귀환하여 호노리우스를 구출하여 알라리크의 전략을 깨트린 뒤, 서로마 전역에서 군단을 소집하여 반격하였다. 402년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지휘하는 군단에 대패하였으며, 처와 자식들도 챙기지 못하고 도주하였다. 이어진 '베로나 전투'에서도 대패하여 알라리크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일리리쿰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알라리크를 처단하면, 그의 빈자리를 체운 새로운 세력이 다시 서로마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로 스틸리코가 보내주었다고도 한다. 408년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죽고,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테오도시우스 2세)가 7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호노리우스는 이를 기회로 동로마에 정치적으로 간섭하려 하였고, 알라리크도 이때 서로마에 협력하는 대가로 보상금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것에 반대하면서도, 알라리크를 포함한 이민족들과 화친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공격받았다. 결국 스틸리코는 정적들에 의해 숙청되었고, 스틸리코를 따르던 이민족 지휘관들도 공격받았기 때문에, 많은 이민족 출신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마를 떠나 알라리크에게 합류하였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죽음을 명분으로 서로마를 침공하였고, 로마시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틀어박혀 있었고, 서로마에는 알라리크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협상에 나섰는데, 로마 시민들의 목숨을 대가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리크의 목적은 정복이나 약탈에 있었던 것은 아닌것 같은데, 그는 평화협상을 하면서 엄청난 영토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충분한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스틸리코의 빈자리인 서로마 총사령관의 지휘와 서고트족이 서로마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동로마의 지원병력이 도착하여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었다고 생각되자, 알라리크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에 알라리크는 409년 다시 로마를 포위하였으며, 이번에는 로마시의 장관이었던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황제로 추대하여, 호노리우스의 지위를 위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였는데, 원로원은 이민족인 알라리크에 대해 무례하고 경솔하게 굴었으며, 호노리우스는 이러한 알라리크의 시도를 무시하고, 협상하려는 알라리크를 급습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알라리크는 410년 로마를 함락시키고 3일간에 걸쳐서 약탈하였다. 이는 '갈리아족'이 이후 역사상 두번째로 로마가 함락된 것으로, 이때 많은 황제의 영묘들이 도굴 당하였고, 많은 로마 시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로마 약탈 후에 얼마 안가서 사망하였는데, 그는 아프리카를 향해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서 남하하다가 병사 했다고 한다. 서로마를 위협하던 이민족의 왕은 죽었지만, 서로마의 몰락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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