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국의 확장 「삼니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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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도

로마의 영향력 확대와 삼니움 족과의 충돌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데는 거의 500년 가까이의 긴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로마 군단은 무작정 강한 군대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데, 로마 군단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면서, 그 경험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고 받아들이며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국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같은 중부 이탈리아에 근거를 둔 '삼니움족'과 부딪히게 된다. 삼니움족은 원래 '아펜니노 산맥'을 근거지로 하여 지형이 험한 산악지대에 자리 잡은 부족으로, 기원전 354년부터 이탈리아 북쪽의 '갈리아족'에 맞서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기원전 343년 삼니움족이 목초지를 찾아 '캄파니아' 지역으로 진출하며, 먼저 있던 도시들과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캄파니아 지역이 중심 도시였던 '카푸아'에서 로마에 동맹을 제의하였고, 로마가 이 동맹에 응하여 군대를 파견하면서 '삼니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삼니움 전쟁은 40년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1 ~ 3차 전쟁까지 나누어 일어났다. 제1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41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되었다. 로마 군단은 평야지대에서 진행된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산악지대로 물러난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난항을 겪었고, 장기전으로 접어드는 전쟁에 지친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집정관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삼니움족과의 협정을 통해 전쟁을 종결시킨다. 협상의 대가로 일부 캄파니아 지역 도시는 삼니움족에게 넘어갔으나, 캄파니아 대부분이 로마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로마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계속되는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7년,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인 '네아폴리스'(현재의 나폴리)의 그리스인들이 로마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을 사절로 파견하여 대응하였는데, 이 사건에 삼니움족이 개입한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에 로마가 삼니움에 항의하면서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투는 기원전 326년에서 기원전 304년까지 약 20년에 걸쳐서 장기전으로 진행되게 된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평야지대에서의 싸움을 선호하였지만, 1차 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삼니움족은 산악지대에서 대치하면서 결정적인 승패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기원전 321년 로마는 '풀리아 평원'에 삼니움족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카푸아에 집결해 있던 로마 군단은 곧바로 진군하였는데, 풀리아 평원을 가기 위해 아펜니노 산맥의 '카우디움 협곡'을 지나다가 삼니움족의 기습을 받게 된다. 사실 그 정보는 거짓 정보였고, 삼니움족은 로마 군단을 패배시키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에 매복해 있었다. 앞뒤가 막힘 카우디움 협곡에 고립된 로마군의 머리 위에서는 삼니움족이 화살을 쏘아 댔고, 설상가상으로 식량도 떨어지면서 결국 항복하게 된다. 이 '카우디움 협곡 전투'는 로마 군단이 당한 치욕적인 패배로, 로마군은 600명의 기병을 볼모로 잡히고, 삼니움족의 영토에 도시를 세우지 않는다는 협약을 맺고서야 해방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지배력에 타격을 받았으며, 약 5년간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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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16년 로마는 다시 군단을 보내 카푸아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듬해 '라울툴라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로마는 근본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것을 느꼈고, 캄파니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빠르게 군단을 전개하기 위해 가도를 건설한다. 기원전 312년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에서 캄파니아 지역까지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게 된다.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캄파니아 도시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였지만, 로마 군단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하고 캄파니아 지역에서 삼니움족을 몰아내었다. 기원전 305년 '보비아눔'전투에서 패배한 삼니움족은 로마에 평화협상을 요구하였고, 긴 전쟁에 지친 로마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탈리아 중부의 패권

삼니움족과 화평한 로마는 내부를 다지며 영향력을 넓히는데 전념하였는데, 그동안 삼니움족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니움족은 로마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하여 '루카니아인'들에게 동맹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여력이 안됬던 루카니아인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면서 제3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아인', 갈리아족을 부추겨서 반 로마 연합 세력을 구성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기원전 298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삼니움의 명장인 '에그니투스'의 계략에 빠져 연합군에 의해 괴멸되는 등, 전쟁 초기에 삼니움족이 승기를 잡으면서 세 갈래로 로마를 공격하였다. 위기를 맞은 로마는 즉시 긴급동원령을 발표해서 시민병과 퇴역군인, 해방노예들을 소집하여 병력을 보충하였다. 이듬해 로마는 새로운 집정관으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선출하였다. 로마 군단과 대치하였던 에트루리아의 부대는 로마군에 전략과 전술이 누설되어 전선을 이탈하였고, 삼니움족은 '티페르눔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기원전 295년 다시 집정관으로 임명된 파비우스와 데키우스는 아펜니노 산맥 동쪽과 북 움브리아에서 연합군과 대치하였는데, 로마 군단은 갈리아와 삼니움의 연합군에 크게 승리하면서, 사실상 반 로마 연합은 해체되게 된다. 이후 기원전 290년까지 홀로 항전한 삼니움족이었지만 차례차례 로마의 영향권에 복속되었고, 비록 전쟁에서 졌으나 삼니움족은 그 용맹함을 인정받아 로마의 동맹국으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이로서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패권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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