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말 삼국시대 제갈량과 방통의 친구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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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날건달의 개심

'서서'(徐庶)의 본래 이름은 '서복'(徐福)으로, 자는 '원직'(元直)을 쓰며, 예주 영천군 장사현 사람이다. 그는 미천한 집안 사람은로 친척이 없고, 모친과 함께 생활한 것 같은데, 서서에 대한 별도의 개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러한 가정환경이었기 때문에, 서서는 어렸을적부터 불우한 생활을 한 것 같은데, 젊었을때부터 검술을 좋아하고, 그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면, 사실상 날건달에 가까운 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도중 다른 사람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도주하였는데, 도중에 관원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서서는 관원들의 심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관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수레에 묶고 돌아다니며, 그를 아는 사람들 찾았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평소 그의 패거리가 몰려와 서서를 풀어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이후부터 서서는 마음을 고쳐먹어 학문에 매진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평소 행실을 알게 된 유생들은 그를 멀리하였고, 그는 다만 동향인 '석도'와 친해졌다고 한다.

수경선생의 제자들

이후 중원에서 전란이 일자 이들은 남쪽의 형주로 피난을 떠났고, 여기서 '수경선생'으로 유명한 '사마휘'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제갈량'이나 '방통', '맹건' 등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에 대해 민간에 전승되는 일화가 있다. 서서 등이 사마휘의 제자가 된지 얼마 안되었을때, 스승인 사마휘가 제자들을 방안에 모아놓고, 자신과 논쟁하여 방에서 나가라는 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합격이라는 시험을 내놓았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휘에게 '이 늙은이야, 너한테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냐, 내 학비 돌려내라'하고 난동을 피웠고, 이에 서서와 방통이 재빨리 '저희가 끌어내겠습니다.' 하고 나섰다고 한다. 사마휘는 세 사람에게 빨리 나가라고 하였고, 이에 세 사람은 시험에 합격하였다. 사서에는 서서와 석도, 맹건 등은 학문을 익히는데에 있어서 세세하고 정확하게 공부하였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다르게 대략적으로 전체적인 큰 틀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고 한다. 이에 제갈량이 세 사람에게 벼슬을 하게 되면 주자사나 태수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고, 서서들이 제갈량에게 본인은 어떠하냐고 물으니 그저 웃었다고 한다. 또 제갈량이 늘 자신을 '관중'이나 '악의' 같은 역사적 인물에 비교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를 허언 취급했지만, 제갈량의 벗이었던 서서와 '최주평'만이 이에 수긍했다고 하기도 한다.

입신양명

'유비'가 신야에 있을때 사마휘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는데, 사마휘는 '와룡'과 '봉추'를 추천하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묻는 유비에게 '제갈량'과 '방통'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서서도 사마휘를 방문하였는데, 연의에서는 사마휘가 서서에게 유비를 찾아가 섬기도록 조언하였다고 한다. 서서는 유비의 부하가 되어 제갈량을 천거하였는데, 유비가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오도록하자, 서서는 유비에게 직접 제갈량을 찾아가도록 알려주었고, 이를 계기로 유명한 '삼고초려'가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유비가 의탁하고 있던 '유표'가 사망하고, '조조'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오자, 유비는 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피하였다. '장판파'로 잘 알려진 이 도피 행렬에서 유비를 따랐던 많은 민중들이 조조군에게 잡혔고, 서서 또한 노모가 조조군의 세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효를 위해 유비를 떠나 조조 밑으로 귀순하게 된다. 서서와 석도, 맹건 등은 모두 조조 휘하에서 벼슬을 하였고, 서서는 '팽성상', '우중랑장', '어사중승' 등을 역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까지도 서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이후에 서서로 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연의에서는 서서가 신야에서 '조인'이 지휘하는 조조군을 격퇴하거나, '적벽대전'에서는 조조군 휘하에서 방통의 '연환계'를 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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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제갈량은 후에 승상이 되어서 부하들에게 서서의 재능의 십분의 일과 '동화'의 부지런함만이라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북벌을 진행하면서, 서서와 석도, 맹건들의 위나라에서의 직위에 대해 알게 되자, 위나라에 인재가 너무 많다며, 그들이 너무 낮게 쓰인다고 이야기 했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 제갈량이 친구였던 서서의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인용되기도 하는데, 후자는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촉나라의 인재없음을 한탄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서서가 능력이 출중했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은데, 그가 변변찮은 집안 출신으로 인재가 많았던 위나라에서 그만큼 출세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상당히 오래 살았던 것 같은데, 서서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조조의 손자인 '조예'가 통치하던 234년경에 병을 앓았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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