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24대 황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 역사
- 2023. 2. 26.
황제 즉위와 선정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는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사촌으로, 엘라가발루스의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로, 208년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서 출생하였다. 219년 엘라가발루스가 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의 계략으로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 황제를 축출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같이 로마로 입성한 것 같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가 그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와 이따른 기행과 실정으로 로마 시민과 원로원, 나아가서 지지기반이었던 로마 군단병들의 인기까지 잃으며, 정권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율리아 마이사는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엘라가발루스의 양자로 들이게하여, 새로운 후계자에 쏠린 관심을 이용하여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는 로마로 오고나서부터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의 지도 아래 로마식 교육을 받았었다고 하는데, 엘라가발루스의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면서 동방 문화에 치중하는 듯한 모습과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이에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견제하였고, 나아가 근위대에 간접적으로 암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위대는 그들의 요구에 분노하였고, 반대로 황궁으로 쫒아가서는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살해하였고, 원로원은 기록말살형을 내려서 처벌하였다. 그러나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는 율리아 마이사의 의도대로 새 황제로 추대되었고, 권력은 지켜질 수 있었다. 222년 황제가 된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구스투스'로 보통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로 불리웠다고 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도 엘라가발루스처럼 정통성은 없었지만, 전임자의 심각한 실정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즉위할때 상당히 호평이었던 것 같다. 엘라가발루스 통치때부터 실질적으로 정치를 시행하고 있던 율리아 마이사도,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생각한 것 같은데, 유명한 법학자인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를 근위대장에 앉히고, 측근으로서 정치를 돕게 하였다. 또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때부터 큰 공을 세워 로마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 등에게 도움을 청해 로마를 안정시켰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차분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새 황제가 옛 로마 황제들처럼 공공사업에 힘쓰고, 세금을 인하하는 등 민생을 살피는 정책을 펴면서, 집권 초기에는 상당한 치세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왕국으로 치면 재상에 해당하는 실무를 처리하는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의 직위가 근위대장인 것이다. 사실상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관료들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 근위대장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의 몰락과 율리아 마이사의 사망
이러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 의한 치세에도,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이 문제는 다시 점점 표면으로 들어나기 시작했다. 224년경 황제의 고문이자, 근위대장이었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황궁 한가운데서 근위대 병사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현 정권의 실제 중 하나이자, 정책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부하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의 행동이나 정책으로 인해 근위대에 불만이 쌓였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근위대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로마 제국에는 많은 황제와 관료들이 근위대에 의해 암살된 전례가 있고, 몇명의 황제는 근위대를 등에 엎고 즉위하였으며, 근위대장이 황제가 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 게다가 이번에는 주모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도 못하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는데, 그들을 처형하지도 못하고 형식적인 추방을 명했을 뿐 아니라, 그마저 근위대 병사들의 반발로 시행하지도 못하였다. 이제 로마 권력의 중심인 황제도 병사들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어서 율리아 마이사도 사망하였는데, 이제 실권은 황제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에게 상당히 의존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정책에 개입하는데 있어서, 선을 넘지 않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던 율리아 마이사가 없어지면서, 정권은 다시 위태로운 곳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225년 율리아 마마이아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로마의 귀족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의 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와 결혼 시켰는데, 이를 통해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면서, 로마 정계에 협력자를 얻으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이후 율리아 마마이아의 행동에 의해 완전히 쓸데없는 행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 안좋은 결과를 불러왔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황후가 된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이로 인해 황제의 어머니와 황후 사이에 권력 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자신에게 의존적인 황제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정책에 개입하려고 시도 하였고, 황제의 사랑을 받는 황후는 그러한 행위를 견제하려 든 것이다. 로마의 사실상 최고 실권자에게 미움을 받자,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와 황후는 상당한 위협을 느꼈고, 그로 인해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근위대와 접촉한 것 같다. 황제는 이러한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했고, 상황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226년 율리아 마마이아는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를 국가 반역죄로 고발하여 처형하였다. 그리고 황후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는 강제 이혼시키고, 로마에서 추방해 버렸다. 자신들의 보호를 받던 이들이 처분되자 근위대는 상당한 불만을 가진 것 같은데, 사실상 황제조차 근위대로부터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227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세웠는데, 그가 율리아 마마이아와 친분이 있는데다, 근위대가 원래부터 싫어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근위대의 불만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러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인지, 황제는 디오 카시우스에게 로마 밖에서 집정관직을 수행할 것을 권했으며, 디오 카시우스 본인도 곧 로마를 떠나 은퇴하듯 고향으로 향해버렸다.
페르시아 왕국
이러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황이 로마 내부에서 계속되고 있을때, 로마 밖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의 동방 최대의 문제였던 '파르티아'가 무너지고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강력하고 새로운 적은 로마를 침공하였으며, 이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231년 직접 동방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결단은 분위기가 안 좋은 로마를 일단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자, 기존의 황제들처럼 전공을 세워 인기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다뉴브 강' 일대의 로마 최정예 군단을 규합하고, 곧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이후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동방의 군단들의 상태는 처참하였고, 이를 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지휘관들이 아닌 일반 병사들만 질책함으로 분위기는 더 나빠졌다. 결과적으로 이 원정을 통해 페르시아를 격퇴하였고, 이후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로마 제국을 침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로마도 페르시아도 큰 피해를 보았고, 로마 지휘부의 오판으로 상당한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동방에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인기는 오르기는 커녕, 오히려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직 경험이나, 군 경험이 없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사실상 첫 원정에서 커다란 전과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황제 본인의 사정일 뿐이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때부터 정권의 기반이 로마 군단의 병사들의 지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별로 좋지 않은 것 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황제는 로마로 귀환하면서 개선식을 거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병사들의 지지는 잃고, 반대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지지는 일부 회복하게 되었다.
군인 황제의 시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동방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동방의 지식인들을 데려와서 로마의 내치에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는 또 다시 외적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적이었던 '게르만족'이 다시 침입해 왔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다시 한번 직접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동방 원정의 경험을 살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력을 차출해서 '게르마니아'를 공격했다. 전쟁은 초기부터 승리를 쌓으며 상당히 좋은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내부에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의존성향을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번에도 율리아 마마이아가 게르만족과 화친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이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을 우려하였고, 이런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235년 병사들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황제의 막사로 쳐들어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율리아 마마이아 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장군들과 원로원 의원들까지 모조리 살해하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본격적으로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군대에 의해 황제가 된 사람들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후 약 50년간 무려 26명에 달하는 인물들이 황제임을 주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