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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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측량기사 워싱턴

'조지 워싱턴'은 1732년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 식민지의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어거스틴 워싱턴'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메리 볼 워싱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싱턴 가문은 본래 영국의 귀족 가문이었지만, 청교도 혁명이후 몰락하여 1657년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였는데, 상류층에 속하는 부유한 집안으로 상품작물인 담배를 재배하는 농장과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인 어거스틴 워싱턴은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의 판사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이 11살때 아버지가 사망하였는데, 이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 '로렌스 워싱턴'이 가장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관이었던 로렌스의 영향으로 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은 어렸을적부터 측량 기술을 익혀서 측량사로 활동하였던 것 같은데, 1749년에는 18세의 나이로 '윌리엄&메리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측량사 자격증을 수여받아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버지니아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는데, 로렌스의 처가인 페어팩스 가문의 지원하에 워싱턴도 측량 업무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또 이때 새로 생긴 컬페퍼 카운티의 측량기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측량 업무를 수행하면서 농장도 관리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버지니아 오하이오 컴퍼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후 1751년에 로렌스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한동안 버지니아를 떠나 '바베이도스'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지만, 이듬해인 1752년에 로렌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와서 로렌스의 땅 일부를 상속받으면서, 그가 수행하던 민병대의 부관 업무를 일부 계승하였다. 그리고 이 해 말에 버지니아의 새 총독로 부임한 '로버트 딘위디'가 민병대를 개편하면서, 워싱턴은 정식으로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관으로 임명되었으며, 20살의 나이로 소령 계급이 되었다. 1753년 오하이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워싱턴은 딘위디의 요청을 받고 프랑스군에게 오하이오에서 퇴거하도록 경고하는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버지니아 총독의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버지니아의 최후통첩에 해당하는 서신이었다. 1754년 본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었고, 워싱턴은 전쟁 초기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몇차례 전투를 치루었다. 1755년에는 본국에서 파견된 지위관인 '에드워드 브래독' 소장의 현지 자문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민병대인 버지니아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퇴임하는 1758년까지 계속해서 종군하였다. 1759년에는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하였는데, 막대한 재산을 가진 미망인이었던 그녀와 결혼한 워싱턴은 당대 버지니아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본래도 어느정도 부유한 계층에 속했던 워싱턴이었지만, 이 결혼을 통해 미국 식민지에서 손에 꼽히는 최상류층이 되었기 때문에, 워싱턴이 그녀의 재산을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덕분에 워싱턴은 광활한 토지와 수백명이 노예들을 보유한 유력자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벌어지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워싱턴이 얻게되는 지위의 토대가 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워싱턴은 한동안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1758년 버지니아 의회의 의원이 되는 등 농장을 경영하면서, 정치사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인디언 전쟁을 포함한 '7년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는 동시에 영국 정부에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 때문에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제한을 두었으며, 또 인지세 등 증세 정책을 시행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프랑스 인디언 전쟁은 결과적으로 영국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전쟁이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세력의 이익을 위해 시작된 전쟁이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식민지 세력 간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고, 그 결과 1773년에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결국 1774년 영국의 13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참여한 '대륙 회의'가 개설되어,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앞으로의 향방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영국 정부는 계속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1775년 영국군에 의해 '렉싱턴 콩코드 전투'가 벌어지면서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첫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워싱턴은 대륙회의에 의해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소규모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는 아직 영국에서 독립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776년 '토마스 페인'의 '상식론'이 출간되면서 조금씩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워싱턴도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대륙회의에서 독립 결의안이 통과되어, 1776년 7월 4일 '미국독립선언서'가 채택되었다. 이로서 대륙회의는 일종의 미국의 임시정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독립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상황은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대륙군은 대부분 민병대로 구성되어 제대로 된 전쟁이나 전투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었으며, 장비나 물자도 부족하였고, 무엇보다 막연한 애국심이나 애향심 같은 것을 기반으로 모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속력도 그리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륙군은 전쟁 초기 정규군인 영국군을 상대로 연패하였으며, 이에 워싱턴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적의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대규모 전투를 피하고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적이 소모하도록 유도하기로 하였다. 또 워싱턴은 '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대륙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을 만들었다. 1777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 방면에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는데, 대신 뉴욕주의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대승하면서 영국군의 소모는 가속화 되었다. 이후 '밴자민 프랭클린' 등의 인사들이 외교를 통해 외국의 지원을 끌어냈는데, 1778년에는 프랑스가 참전하였으며, 프랑스의 동맹으로 스페인도 참전하였다. 또 1780년에는 네덜란드도 참전하는 등 상황은 영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이 대륙군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등 심기일전하여 뉴욕으로 전면 철수하는 영국군을 공격하여 '몬머스 전투'에서 타격을 주기도 하였지만, 영국군 뿐만 아니라 대륙군도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었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을 하는 등 결속력이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반전여론이 들끌기 시작하였다. 영국군도 대륙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지만 어느쪽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서로 기나긴 전쟁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전쟁을 끝낼 계기가 나타나는 일만 남았었다. 1781년 서인도 제도에 있던 프랑스의 함대가 대대적으로 북상하였는데,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일시적으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 워싱턴은 뉴욕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본대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 해전을 승리하면서 대륙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영국군의 분대가 주둔하고 있던 요크타운 요새를 포위하기로 하였다. 영국군은 요크타운에서 분전하며 한달가량 버텼지만 결국 항복하였고, 이 패배를 기점으로 영국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손을 때게 된다. 그러나 이후로도 여러 이유로 전쟁은 2년 가량 더 이어졌고, 1783년에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은 정식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워싱턴은 총사령관에서 물러나서 다시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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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국 대통령

1781년 대륙회의는 해산하고 '연합회의'로 개편되었고, '요크타운 전투' 이후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평화협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챙취하고 나자, 연합회의의 구심점이 약화되는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합회의는 13개의 구성 주에 의한 연합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각 개별 주들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길고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6년 '셰이즈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체제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진 회의에서 '미국 헌법'의 초안이 만들어졌다. 워싱턴도 이때 버지니아주의 대표이자 제헌회의 의장으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각 주에서 비준되어 연방국가인 미합중국이 탄생하게 되었고, 1788년에는 미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의 선거인이 채택되었으며, 1798년에 미국에서 첫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워싱턴 자신은 대통령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데, 38,818명이 참가한 일반 투표에서 모든 표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또 당시 사정으로 선거인단을 보내지 못한 뉴욕주를 제외하고, 10개 주에서 총 69명의 선거인단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각각 한명당 두표씩 행사할 수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 중 한표를 워싱턴에게 투표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결과는 워싱턴 개인의 역할도 기여했겠지만, 당시 미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투표라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워싱턴은 미국 최고 부자중 한명이며, 영국과의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아 결과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국 헌법이 제정될때 제헌의회 의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지명도 만큼은 최고 였을 것이다. 또 이 투표에서 두번째로 많이 득표한 '존 애덤스'가 헌법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초대 국무장관은 '토마스 제퍼슨'이 임명되었고, '알렉산더 해밀턴'이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스스로 왕처럼 행동했는데, 사실 이 당시에는 대통령이란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왕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불리웠으며, 유럽의 왕실들처럼 접견회나 파티를 열고, 미국 전역을 화려하게 순방하였고, 국민들 또한 워싱턴을 왕처럼 대접하였다. 또한 실제로 당시의 대통령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실질적인 통치는 의회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대신 그는 대표자로서 의회의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를 중재하였으며, 1794년에 일어난 '위스키 반란'에서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또 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로 인해 영국이나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아지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신생국이었던 미국이 내부 문제에 집중하면서, 국력을 키울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1792년에 시행된 두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도 워싱턴은 일반 투표와 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득표하여, 실질적인 만장일치로 재선에 당선되었고, 존 애덤스도 부통령으로 재선하였다.

은퇴와 사망

1797년 두번째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중임 제한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하도록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워싱턴이 장기 집권이 가져올 폐해를 걱정했기 때문에 물러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그 후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두번까지만 재임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으며, 이는 1940년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3선에 당선할때까지 계속되었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을 4선까지 지냈으며, 이후 1947년 비준된 미국 수정 헌법 제22조에 따라 3선 출마가 제한되었다. 워싱턴은 은퇴하며 발표한 '고별사'에서 내부의 결속과 외국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면서, 정단 간 극심한 대립에 대해 경고하고, 헌법과 절차를 지키며, 다시 군주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사저로 돌아간 워싱턴은 1799년 은퇴한지 2년만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미국의 대통령 제도가 확립되는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으며, 그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남으로 인해 민주적인 국가 지도자이자, 청렴하고 욕심없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였으며, 버지니아 주의 의원, 대륙군 총사령관, 미국 초대 대통령까지 다 이루었는데, 달리 힘들고 번거로운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있었는가 싶기도 하다. 그저 대농장과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데, 궂이 계속해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할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또 그가 현직에 있을때 수도로 정한 위치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1791년 이 도시는 수도 건설을 감독한 세 명의 위원에 의해서 워싱턴 시(워싱턴 D.C.)로 이름붙여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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