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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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네덜란드계 미국인

'마틴 밴 뷰런'은 1782년 미국 뉴욕 주의 킨더후크에 있는 네덜란드 공동체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네덜란드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왔는데, 네덜란드 공동체에서 계속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밴 뷰런도 어린시절부터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네덜란드어가 뷰런의 모국어였다고 할 수 있다. 뷰런의 아버지는 킨더후크 지역에서 선술집과 여관을 운영하였고, 그외에도 흑인 노예를 사역하여 채소를 기르는 작은 농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밴 뷰런은 마을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영어와 기본 교육을 받았는데, 14세에는 지역의 저명한 변호사였던 '피터 실베스터'의 사무실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801년에는 '요하네스 페트루스 존 피터 반 네스'의 권유를 받아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서 변호사 실습을 계속이어 갔고, 1803년에 뉴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정받아 다시 킨더후크로 돌아와서 개업하였다. 밴 뷰런은 변호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사실상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민주공화당 지지자 였으며, 그의 첫 스승 피터 실베스터는 연방당 소속의 정치인이었다. 또 그가 뉴욕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를 지원해준 반 네스는 개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던 민주공화당의 정치인이었는데, 밴 뷰런은 뉴욕에서 민주공화당의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그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경력은 그를 본격적으로 정치계로 이끌어 1812년에는 뉴욕 주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고, 1815년에는 뉴욕의 법무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이듬해인 1816년에는 상원의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앤드루 잭슨과 연대

당시에는 연방당이 몰락하면서 민주공화당이 득세하였는데,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도 주도권을 쥐기 위한 내부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밴 뷰런도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824년에 치루어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밴 뷰런은 '윌리엄 크로퍼드'를 지지하였는데, 미주공화당의 내분으로 당에서 후보가 4명이나 출마하였고, 그나마도 과반을 얻은 후보가 없어 대통령 선출 절차가 하원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결과적으로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앤드루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결과에 불복하여 항의하였고, 다음 선거를 위한 선거운동이 상당히 혼탁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밴 뷰런은 다음 선거에서 잭슨이 유력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그는 이후 잭슨을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 시기에는 투표권이 점점 확대되던 시기로, 각 주에서는 투표 자격을 재산을 기준으로 부여하던 것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들에게 모두 부여하는 보통 선거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에 따라 투표권은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따라서 전쟁 영웅으로 일반 대중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던 잭슨이 상당히 유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밴 뷰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효율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기 위한 일종의 선거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현대의 선거에서도 쓰이는 시스템이지만, 당시에는 법이나 규제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매수나 선동 등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문제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선거 조직을 구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구성된 선거 조직은 소위말하는 정치적 후계자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정치 파벌이 결성되고 굳어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1828년에 밴 뷰런은 잭슨의 선거를 돕기위해 뉴욕 주지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이후 잭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43일만에 사임하고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잭슨 정부에서 밴 뷰런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와 덴마크의 군함 등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미국 선박들의 피해 배상을 위한 협상에 노력하였고, '페티코트 사건'으로 인해 여러모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임기 후반인 1831년에는 국무장관을 사임하고 영국 주재 공사로 부임하기도 하였지만, 상원에서 그의 임명을 거부하면서 다시 귀국하였고, 1832년에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에는 잭슨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하였다. 그들은 선거에서 성공적으로 승리하였고, 밴 뷰런은 '은행 전쟁'에 참전하는 등 착실하게 잭슨의 영향력을 이어받아, 사실상 그의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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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8대 대통령

1836년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밴 뷰런은 잭슨의 지지를 얻어 어렵지 않게 당선되었다. 밴 뷰런에 대한 지지가 잭슨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만큼, 밴 뷰런의 정부도 잭슨의 연장선상에 있었는데, 잭슨의 집권시기부터 진행해 오던 여러 정책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잭슨 정부에서 임명된 많은 관료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로인한 문제점도 그대로 계승되어, 1837년 밴 뷰런이 집권한지 채 세 달도 되기전에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이전 정부에서 은행 전쟁을 벌이면서 뿌려둔 씨앗이 이제 돌아온 것인데, 이로인해 민주당은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밴 뷰런은 임기중에 효과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잃었다. 인디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되어, 인디언 강제이주에 대한 반발로 발발한 '제2차 세미놀 전쟁'이 길어지면서 막대한 재정이 군사비로 소모되었다. 또 밴 뷰런은 '텍사스 공화국'의 미국 합병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캐나다에서 일어난 독립움직임에 대해 중립 입장을 취함으로 인해 인기는 계속해서 하락하였다. 1839년에는 '아미스타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면서 노예제에 대한 문제가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184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참패하여 재선에 실패하였다. 밴 뷰런은 이 선거에서 생각보다 쉽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러닝메이트를 맡아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최초로 러닝메이트 없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여러 기록의 보유자

밴 뷰런은 그럼에도 정치활동을 멈추지 않았는데, 1848년에는 '자유토지당'을 새로 만들고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고, 이후 자유토지당을 탈당하고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그 후로 다시 공직에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정치활동을 계속하였고,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폐렴을 앓았고, 이듬해인 1862년에 사망하였다. 밴 뷰런은 미국 초창기의 대통령으로 많은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는데, 먼저 이전의 대통령들이 주로 영국계 이민자들이었던데 반해, 첫 네덜란드계 이민자 대통령이었다. 또 그가 미국 독립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첫 미국인 출신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밴 뷰런은 국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세 직책을 모두 경험한 대통령은 '토마스 제퍼슨'과 뷰런 뿐이며, 제퍼슨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을때는 따로 부통령을 뽑은게 아니라, 선거에서 차석으로 당선된 사람이 부통령을 맡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뷰런 혼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찬가지로 부통령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모두 당선된 사람은 지금까지 뷰런을 포함하여 두 명 밖에 없다고 한다. 또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이례적으로 8명의 후임 대통령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의 후임 대통령 중 두 명은 임기중 사망하였고, 이후 두 명은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퇴임 후인 1853년에는 유럽을 방문하기도 해서, 퇴임 후 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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