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해적의 황금시대 악명 높은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
- 역사
- 2023. 10. 29.
정체불명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는 해적 생활을 하다가 체포 중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그가 사망할 때 35세에서 40세 정도의 나이였던 것을 감안하여 168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더해 티치의 선원으로서의 능력을 근거로 하여 당시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중요한 국제 항구였던 브리스틀 출신으로 추정하는 이가 많으며, 그가 읽고 쓰기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근거로 생각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도 있다. 또 같은 이유로 티치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 영국 소속의 사략선을 타고 전쟁에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위의 사항 중 그 어떤 내용도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다. 어찌 되었든 그는 전쟁이 끝난 1713년 이후 유명한 해적들의 안식처인 '뉴프로비던스 섬'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1716년경에 그곳을 거점으로 활발한 해적 활동을 벌였던 '벤자민 호르니골드'의 해적단에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검은 수염
벤자민 호르니골드는 곧 나포한 배 중 한 척을 티치에게 맡겨 선장으로 삼았는데, 티치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하였거나, 어쩌면 두 사람은 전쟁 중 안면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티치와 호르니골드의 작은 해적 함대는 꾸준히 약탈에 성공하며 명성을 쌓았고, 도중에 '스티드 보넷'도 해적단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호르니골드는 해절직을 하면서도 과거 전쟁에서 적이었던 국가의 함선만을 공격하고 영국의 함선은 보내준 것 같은데, 이 때문에 해적단 안에서 불만이 생겼고, 결국 호르니골드는 1717년 말에 해적단을 떠나 '조지 1세'가 내린 사면령을 받아들여 은퇴하게 된다. 얼마 후 해적단의 우두머리가 된 티치는 프랑스 국적의 노예 운반선인 '라 콩코드'를 나포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그는 이 배를 개조하여 자신의 기함으로 삼고, '앤 여왕의 복수'라고 이름 지었다. 티치는 약탈을 할 때 전투가 발생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는 상대방이 저항 없이 항복하면 귀중품과 항해도구 등 만을 가져가고 풀어주었으며, 도망가는 함선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하여 밤 중에 급습하여 배를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약탈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이용하였는데, 티치는 오랫동안 기른 자신의 검은 수염을 땋아 올려 머리에 묵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모자 밑에 '화승'(도화선)을 찔러 넣고 불을 붙여 연기가 나게 만들었고,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부하를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여섯 정의 권총과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적을 위압하는 역할도 하였겠지만, 동시에 부하들을 통제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외모로 인해 그는 이름보다 별명인 '검은 수염'으로 더 유명하다.
무법자의 최후
티치는 순조롭게 해적질을 이어나갔는데, 1718년에는 영국의 식민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 타운 항구를 봉쇄하고 선박들을 나포하였으며, 그중에는 캐롤라이나 주 의원과 시민 단체가 탄 선박도 있었다고 한다. 티치는 선박들과 포로들을 볼모로 찰스 타운을 협박하여 원하는 바를 손쉽게 쟁취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대대적인 해적 토벌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들을 수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티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티치의 기함인 앤 여왕의 복수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는 일이 일어났고, 이어 이를 끌어내려던 슬루프 한대가 추가로 좌초되면서 해적단의 함선은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해적단은 어쩔 수 없이 남은 두 척의 슬루프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티치는 해안에 보넷과 일부 선원들을 남기고 떠나면서 곧 구출하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대로 당시 노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였던 '찰스 이든'을 찾아가서 사면을 신청했다. 티치는 이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배스에 정착했는데, 그가 그곳에서 마을의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티치에게 정착생활은 맞지 않았는지, 그는 곧 이든에게 사략선으로서 업무를 받을 수 있는 지를 알아보겠다는 구실로 항해허가를 받아냈다. 그러고 나서는 곧바로 해적질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펜실베이니아의 주지사는 티치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티치는 나포한 프랑스 국적의 선박을 끌고 와서는 해상에 버려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였는데, 이든도 그의 해적 행위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티치는 결국 계속해서 해적질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근의 버지니아 주지사가 티치에 대해 주목하였고, 그는 위험의 제거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티치를 체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718년 말에 토벌대는 노스캐롤라이나 앞바다의 '오크레코크' 섬에서 티치의 일당을 발견하였는데, 이후 둘 사이에서 매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토벌대의 함선은 매우 심각한 손상을 받았지만 전투는 백병전으로 이어졌고, 토벌대는 상대적으로 높은 훈련도와 숫적 우위를 이용하여 티치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티치는 이 전투에서 질풍과 같이 싸웠다고 하는데, 다수를 상대로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가 죽은 후에 살펴본 바로는 5군데의 총상을 비롯하여 총 25군데에 상처를 입었었다고 한다. 티치가 죽자 곧 남은 해적들은 모두 항복하였고, 이렇게 악명 높은 검은 수염은 죽음으로 해적질에서 은퇴하게 된다. 티치의 경우도 그렇지만 많은 해적들인 한 번은 사면을 받고 손을 씻었다가 다시 해적질에 가담하곤 하는데, 이후 그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지만 한 번 발을 담근 범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