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최고의 명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 역사
- 2023. 5. 3.
게르마니아의 사령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는 7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코르불로의 아버지와 외삼촌은 모두 황가와 인연이 있었으며, 로마 제국에서 법무관까지 지낸 상당히 영향력 있는 원로원 가문 출신이다. 코르불로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칼리굴라'의 집권기로 39년에 두명의 집정관이 황제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두 집정관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때 공석을 체우기 위해 코르불로가 집정관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한 시기에 집정관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코르불로는 갈리굴라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즈음에 코르불로의 여동생이 칼리굴라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며, 임신하였기 때문에 곧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41년에 칼리굴라와 함께 여동생도 암살당하였기 때문에, 그 덕을 많이 보지는 못 한 것 같다. 이후에 행적이 뜸하다가 47년에 다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군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게르마니아는 로마에 있어서 항상 가장 중요한 최전선으로, 이곳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상당히 신임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르불로는 게르마니아에 도착하자 마자 일대의 게르만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서 라인 강 일대에서 주도권을 잡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또 쾰른을 재건하는 등 운하, 도로 등을 건설, 보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코르불로는 '로마 군단은 곡괭이로 싸운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52년에는 다시 동방의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고, 54년에 코르불로를 신임하던 클라우디우스가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하였다.
동방 정벌
54년에 17세의 '네로'가 황제에 취임하자,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1세'가 혼란을 틈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있던 '아르메니아'로 침공하여, 자신의 동생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자 동방의 관리를 맡은 코르불로는 58년에 로마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수도인 '아르탁사타'와 대도시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키고, 티리다테스를 몰아내고 로마에서 성장한 친로마 성향의 '티그라네스 6세'를 왕으로 세웠다.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61년 티그라네스 6세가 파르티아의 아디아베네를 침공하면서 다시 전선에 불이 붙었다. 파르티아의 반격으로 티그라네스 6세는 티그라노케르타에서 농성하였는데, 파르티아측에서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전황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이에 코르불로는 유프라테스 강변까지 군단을 이끌고 가서 파르티아를 압박하면서, 볼로가세스 1세와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네로는 카파도키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 한것 같은데, 일설에 의하면 네로는 아르메니아를 아예 속주화 하기 위해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를 보내 점령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쳐 들어간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는 파르티아에게 대패하였고, 그럼에도 볼로가세스 1세는 패배한 로마 군단을 해방시켜주고, 로마와 평화협상을 계속 진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로마가 전쟁에서 패배한 상태로 평화협상을 맺는 것은 로마 제국의 위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전쟁을 계속 하기로 하였다. 63년 코르불로는 다시 아르메니아로 쳐 들어갔지만, 로마측도 파르티아측도 사실상 전쟁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평화협상에 돌입하였다. 로마는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티리다테스가 직접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서 대관식을 하도록하는 조건으로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하였다. 이는 3자 모두에게 납득할 만한 협상이었는데, 먼저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로마와 파르티아 양쪽에서 모두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파르티아와 볼로가세스 1세는 자신과 연결고리가 있는 자가 아르메니아의 왕이 되기 때문에, 로마와 아르메니아 방면의 국경에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 또 로마는 아르메니아의 왕이 로마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티리다테스는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네로는 '네아폴리스'(현재의 나폴리)까지 직접 마중나갔다고 한다. 모든 과정은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진행되었고, 네로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상당히 만족한 것 같다. 이 코르불로의 업적으로 로마는 이 지역에서 50년간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어이없는 죽음
코르불로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장녀는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이 비니키아누스의 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집권기에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반란'에 연루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동생은 '피소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서 처형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네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66년부터 동조자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했다고 한다. '베네벤툼의 음모'로 명명되는 이 계획은 결국 실패하였는데, 67년에 이 반란 계획은 누설되었으며, 반란 계획이 발각되자 비니키아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시기에는 네로는 이미 몇번의 암살 음모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실정으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 사이에서 지지를 잃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로는 로마 시민들과 로마 군단의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던 코르불로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르불로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해 있었는데, 이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지역에서 '열심당'을 주도로 반 로마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네로는 코르불로를 자신이 있는 그리스로 소환하였고, 대신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지역의 반란을 해결하도록 했다. 코르불로는 '코린트' 항에 도착하자마자 자결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악시오스'라고 소리치고 자결했다고 한다. 같은 혐의로 게르마니아 지역의 지휘관 2명도 처벌되었으며, 이로 인해 네로에 대한 평판은 더 안좋아졌고, 네로의 몰락의 단초가 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의 반란 때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였으며, 반란 진압 후 로마 군단의 병사들이 네로의 지지를 철회하는 대에도 이 사건이 충분히 영향을 미첬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