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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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망과 후계자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5년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자 충직한 신하였던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의 두 아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각각 영토를 주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형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카이사르'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하여, '트라키아', '아카이아', 마케도니아의 관리를 맏겼고, 동생인 '플라비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카이사르'는 '폰토스'의 왕으로 하여, 흑해연안의 폰토스 일대를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면서 세 아들에게 로마 제국이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첫째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가 되어,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일부를 다스렸다. 둘째인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되었으며,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 동부를 맡게되었다. 마지막으로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스'가 '콘스탄스' 황제로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 그리고 '다뉴브 강' 일대의 '일리리쿰' 지역을 관리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의 영향을 받아 제국을 분할 통치하도록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한명이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렇게 나누어 준 것인지, 아니면 후계자들 사이의 분쟁을 막아보고자 나누어 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후에 로마가 내전에 다시 휩싸이게 된 것을 보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의도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에게 관리할 영토와 권력을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사후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 결정으로 보이는데, 이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고 얼마 안가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이 아닌 이복형제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일가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들 중 누군가가 그들을 숙청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보이는데, 그 배후로는 지배영역이 겹치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유력해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알려진 증거나 기록은 없으며, 범인이 한명이 아닌 여럿이 협력한 것 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로서 자식들과 조카들이 협력하여 통치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유언은 시작부터 지켜지지 않았으며, 이는 앞으로의 형제간이 권력 다툼을 마치 예시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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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는 316년경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태어난지 이듬해인 317년에 카이사르로 선포 되었고, 이후 320년과 321년, 324년, 329년에 집정관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또 326년에는 형인 '파비우스 율리우스 크리스푸스'가 계모와 간통한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뒤를 이어 갈리아 지역의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때 그는 겨우 10살의 나이였으니, 이점을 보면 당시 로마 제국의 실권은 전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있었으며, 그가 기존의 황제들처럼 '원수정'의 형태로 통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방의 왕국이나 제국들처럼 '전제정'으로 통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집정관과 사령관으로써 쌓은 것은 경험이 아니라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다뉴브 강 전선에서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사령관으로 있었으며, 라인 강 전선에서 '게르만족'들을 방어하는 임무도 맡았다. 그러다가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에 3명의 형제들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며, 로마 제국을 3분할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형제들 간에 작은 알력다툼이 계속되었고, 특히 콘스탄티누스 2세는 인접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가장 어린 콘스탄스에게 계속해서 간섭하였는데, 결국 340년에 콘스탄스의 영토를 노리고 군단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신이 선임 황제이기 때문에 로마 군단이 자신에게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알프스를 넘어서 빠르게 이탈리아로 쳐 들어갔으나 콘스탄스가 파견한 군단과의 첫번째 전투에서 어이없게 전사하였다. 황제가 전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싸움이 진행될 수 없었고, 동생인 콘스탄스는 형 콘스탄티누스 2세의 시체를 강에 던져버리게 하였으며, 죽은 콘스탄티누스 2세의 영역을 모조리 차지하였다. 그 후에 기록말살형으로 콘스탄티누스 2세의 기록을 전부 없에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콘스탄스

콘스탄스는 황제가 된 형제들 중 막내로 32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333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포되었고, 335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 계획에 의해 로마에서 통치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후 337년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정식으로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형인 콘스탄티누스 2세가 계속해서 자신의 통치에 간섭하면서 불화가 생겼고,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면서 내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콘스탄스가 이를 막기 위해 보낸 군단과의 첫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사하면서, 형의 통치 지역까지 모두 손에 넣었으며, 그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지 않았던 달마티우스의 통치지역이었던 발칸 반도 지역도 손에 넣으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 보다 더 넓은,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 동방을 관리하던 콘스탄티우스 2세가 '페르시아'를 견제하는 것 만으로 벅차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분쟁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콘스탄스는 다뉴브 강 일대에서 전공을 세웠고, 갈리아 지역에서 '프랑크족'과 싸웠으며, 브리타니아 지역까지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한때는 종교적 이유로 콘스탄티우스 2세를 군사적으로 협박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치면에서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것 같고,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들을 심하게 박해하여 처형시키기도 하였고, 신하들로부터 재산을 사실상 갈취하였으며, 황제 스스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자신은 사냥에 몰두하여 정무를 소홀히하였다. 그리고 잘생긴 야만인들과 동성애를 즐겼기 때문에, 이 때문에 군단의 병사들이 그를 경멸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역사적 패자이기 때문에 안좋게 평가된 것 일 수도 있다. 결국 350년 근위대의 지휘관이었던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참칭하였고, 마침 그때 사냥 중이었던 콘스탄스는 이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에 있는 작은 마을에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곧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는 317년에 태어나서, 323년에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의 동방을 맡아서 관리하였는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제국 서쪽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350년에 마그넨티우스가 황제를 참칭하고 콘스탄스를 살해하자, '도나우 강' 일대를 담당하고 있던 군단 사령관인 '베트라니오'도 군단의 추대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동생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군하였기 때문에, 내란은 삼파전으로 전개되게 되었다. 이 삼파전으로 벌어진 내전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마그넨티우스, 베트라니오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눈치를 보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베트라니오를 회유하면서 마그넨티우스와는 협상을 거절하였다. 베트라니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손을 잡기로 하였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뒤로 베트라니오 휘하의 군단 장교들을 포섭하였다. 결국 베트라니오는 황급하게 자비를 청하였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를 사면하는 대신 지휘권을 박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라니오는 그 후 6년간 사망할때까지 연금을 받으면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이 부재중인 동안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을 걱정하여, 337년에 일어난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에서 목숨을 건졌으나 사실상 유폐되어있던 친척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리고 여동생인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켜 동방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나서 군단을 정비하고 마그넨티우스와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351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무르사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353년에는 갈리아로 퇴각한 마그넨티우스를 추격하여, '몬스 셀레우코스'에서 승리하면서 내란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패배한 마그넨티우스를 리옹까지 도망쳤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리옹을 포위하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내란을 진압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국의 서쪽에서 이민족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는데, 354년에 갈루스에 대한 몇가지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평소 의심많은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밀라노로 갈루스를 소환하였다. 처음에는 여동생인 갈루스의 아내 콘스탄티나가 먼저 가서 오빠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설득하려고 하였는데, 여행중에 병사 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다시 갈루스에게 밀라노로 출두할 것을 재촉하였는데, 밀라노에 도착한 갈루스는 체포되었고, 고문을 동반한 심문 결과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혼자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제국의 동방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서쪽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해 방비하기 어려웠고,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5년에 마지막 남은 혈육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주어 서쪽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에 대한 원정을 4차례나 성공시키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를 견제하고자 자금 지원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360년경에 다시 페르시아의 침략이 임박해 오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에 있는 병력을 동방으로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미 갈리아의 군단의 마음은 율리아누스에게 기울어있었고, 군단은 율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서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율리아누스는 군단을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지만, 그 사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중병이 들었고,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사망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들 간의 싸움이 끝나고 율리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이런 후계자들의 다툼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율리아누스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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