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43대 황제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 역사
- 2023. 4. 17.
4명의 황제 중 한명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는 기원전 350년경 로마 변방 '세르디카' 근교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갈레리우스도 동시기 다른 많은 로마 황제들처럼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태어난 미천한 신분으로 출세를 위해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하였다. 285년 로마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를 부제(카이사르)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동과 서로 나누어 각각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범위한 영토를 가진 로마 제국은 국경의 여러지역에서 이민족의 위협을 받았고, 제국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한 시기였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사람의 통치자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93년에는 정제(아우구스투스)인 자신과 막시미아누스 아래에 다시 각각 한명의 부제를 두어 총 4명의 황제가 관리하도록 하는 '사두 정치 체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갈레리우스는 동방의 부제로 임명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판노니아'와 '모이시아', '트라키아' 등 '다뉴브 강' 일대와 그리스 북부지역을 관리하였고,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서방의 부제로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제국의 서방을 관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제들간에 결속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부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강 인근의 이민족을 토벌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296년에는 '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가 로마의 동맹인 '아르메니아'를 쳐들어가 왕을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보내 이를 해결하게 하였다. 갈레리우스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페르시아군과 격돌하였는데, 이때 크게 패해 시리아로 퇴각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패배한 갈레리우스를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297년에 다시 페르시아를 공격하였는데, 이번에는 갈레리우스가 빼앗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되찾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른 군단을 이끌고 이를 보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급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고 나르세스 1세가 페르시아군을 이끌고 몰려오자, 갈레리우스는 일단 '카파도키아'로 퇴각하였다고 한다. 나르세스 1세는 로마 군단을 섬멸할 기회라고 판단하고 카파도키아까지 추격하였는데, 겨울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중지하고 숙영지를 세워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겨울이되면 전투를 중지하고 숙영하거나 퇴각하였는데, 갈레리우스는 이대로 겨울이 지나가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갈레리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페르시아군을 기습하였고, '사탈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나르세스 1세는 부인과 후궁들도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한다. 갈레리우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쳐들어가,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진정시키고, 나르세스 1세와 평화협상을 하여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었다. 대신 아르메니아의 왕을 복위시키고,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로마의 영역으로 하였는데, 이후 40여년간 로마와 페르시아는 전쟁을 벌이지 않게 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이 공을 인정받아 '페르시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4명의 황제 중 첫번째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함께 황제의 자리에서 은퇴하면서, 콘스탄티우스와 함께 정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중 갈레리우스가 더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것 같은데, 새로 임명된 서방의 부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로 갈레리우스의 부하였으며, 동방의 부제는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로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였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아들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군단의 추대로 황제가 되어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는 정제로하고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부제가 될 것을 조건으로 승락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은 이미 군단을 포섭한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의 요구를 거절하였을 경우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 같은데, 이는 오히려 사두정치 체제를 붕괴시키는 트리거가 되었다. 당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의 사위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는 신분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의 의지로, 권력을 혈연을 통해 승계하는 것을 경계한 조치로 보이는데, 갈레리우스가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면서 막센티우스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로마의 시민들과 원로원을 선동하여 지지를 얻었고, 갈레리우스에게 자신도 부제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갈레리우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생각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면서 군사반란을 억제하려던 사두 정치 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반대로 군사반란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이에 더해 막시미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복위하는 것을 선포하고, 아들인 막센티우스를 도왔다. 이로서 로마 제국에는 동시에 6명이 황제가 함께하게되었다. 서방의 정제였던 세베루스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로마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태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직접 군단을 이끌고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에게 패배하였고, 세베루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 또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하였지만, 오히려 군단 병사들이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의 편을 들어 탈영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서 퇴각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박해와 사망
308년 이러한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가 '카르눈툼'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는데,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복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 다시 은퇴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회담에서 큰 성과는 없었던 것 같고, 세베루스의 사망으로 인해 자리가 빈 서방의 정제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를 임명하였는데,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의 오랜 친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갈레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안 좋은데, 이는 갈레리우스가 자신과의 친분으로 황제자리를 주선해 준 것과는 상관이 없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기독교 탄압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시대 흐름에 따라 기독교 교인들도 상당히 늘어났기는 하지만 로마에서는 여전히 이교였고, 로마가 전쟁이나 기타 필요에 의해 종교를 이용하여 동원할때 기독교 교인들이 비협조적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인데, 이들의 이러한 비협조적인 태도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통치자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의 통치시기를 '대박해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311년에 돌연 로마 가톨릭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했다고 한다. 이때 갈레리우스는 병을 앓아 몸져누워있었는데,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칙령을 발표한지 한달만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가 살아있던 동안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했던 로마 제국은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