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 한번 멸망한 한나라를 다시 세운 광무제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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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집금오와 음려화

'유수'는 기원전 5년경 중국의 전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전한 황실의 종친으로 전한 '무제'의 이복형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다. 당시 유수의 아버지 '유흠'은 진류군 제양현의 현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3년에 유흠은 남돈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고, 유수의 가족은 숙부 '유량'이 있는 채양현으로 옮겨 생활하였고, 이때부터 유수는 큰형인 '유연'을 아버지처럼 따르게 됐다고 한다. 유수는 형을 도와 농사를 부지런히 지으며 집안 살림을 도우며 생활하였고, 이즈음인 8년에 '왕망'이 선양의 형태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이 멸망하게 된다. 이 시기에 유수는 농사를 지으며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수도 장안에 있는 태학에 들어가 학업을 시작했으며, 여러 인재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학업을 마친 유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생활하였는데, 한 번은 유연과 매형 '등신', 그리고 '채소공'과 함께 업에서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연회자리에서 도참을 배운 채소공이 장차 유수가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국사공 유수'를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국사공 유수의 본래 이름은 '유흠'으로 전한시절부터 유명하여 왕망의 신임을 받아 신나라에서도 출세했다고 하며, 그 또한 이 도참의 내용을 알고 이름을 유수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유수가 나서서 자신이 아니란 법은 없지 않냐며 농담을 던졌고, 이에 연회에 참석했던 이들이 자지러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 유수는 어렸을 때부터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종종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집금오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직위이고, 음려화는 지역에서 유명한 미녀였다. 유수가 황실 종친이기는 하나 직계가 아닌 방계였고, 현령 벼슬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미 전한이 망하고 새로 신나라가 들어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둘째치고 황실 종친들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적미의 난과 녹림의 난

왕망이 세운 신나라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는 전한의 황제로부터 양위를 받은 것이었고, 국가의 구조면에서도 황제의 이름과 나라이름을 빼면 크게 변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변화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망의 정치는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는 주나라의 통치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기조아래에 시대에 맞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은 모두 처형하는 등 전횡을 일삼으며 폭정을 이어갔다. 결국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일으켜 18년에 산동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눈썹을 붉게 칠했기 때문에 '적미군'이라고 불렀다. 또 남방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가 도적질을 하였는데, 21년에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형주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이들은 녹림산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녹림군'이라고 불렸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유수도 가족들과 함께 신야에 살던 등신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그는 신야와 완을 오가며 곡물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완에 사는 '이통'이 유씨가 일어나면 이씨가 보필한다는 도참의 내용을 가지고 와서 봉기할 것을 권했고, 이에 유연을 중심으로 용릉에서 거병하여 이들을 '용릉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사정은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는데, 유수는 처음에 말이 없어 대신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곧 녹림군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고 그렇게 남양지방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한때 전투에서 패배하여 작은 누나와 작은 형을 비롯한 많은 일족들이 죽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녹림군의 지원을 얻어 기세를 다시 세우고, 남향을 기습하여 신나라 군대의 물자를 노획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내었다. 이처럼 당시 중국에서는 신나라의 군대를 시작으로 적미군과 녹림군 같은 반란 세력들이 날뛰었으며, 조정이 흐트러진 틈을 타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는 등 본격적으로 난세가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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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제 옹립과 곤양대전

유수와 유연이 이끄는 녹림군은 신나라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여 남양 지역을 장악하고 완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많은 민중이 녹림군에 가담하였는데, 녹림의 수장들은 무리가 10만 명에 육박하자 본격적으로 정권을 세울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나라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명분을 얻기 위해 전한 황실의 친적인 유씨를 군주로 내세우려고 하였고, 그 후보로 유연과 '유현'이 올랐는데 녹림군의 수장들이 그중 유현을 새 황제로 내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유연이 머리가 좋고 명성이 높아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유현을 뽑았다고 하는데, 집안 혈통으로 봤을 때도 유현이 더 왕실과 가까웠다. 23년 녹림군이 정식으로 유현을 새 황제로 추대하여 '경시제'가 되었으며, 유연을 대사도로 삼고 유수는 태상에 임명하였다. 경시제의 황제 즉위는 사실상 중원에 한나라와 신나라라는 두 개의 국가가 대립하는 형태가 만들어진 것인데, 왕망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왕망은 대사공 '왕읍' 등에게 군권을 주어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나라의 군세는 무려 10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또 여러 병법에 밝은 이들을 모두 징집하여 참모로 삼았으며, 맹수들까지 동원하여 맹수부대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신나라의 군대는 녹림군에게 포위된 완을 구원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였는데, 유수가 이들과 맞닥뜨려 곤양성에서 농성하였다. 곤양성에는 약 1만 명 정도의 녹림군이 있었지만 신나라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는데, 유수는 이들에게 곤양성에서 농성하도록 한 후에 13명 만을 이끌고 성을 나가 신나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왕읍은 곤양성을 겹겹이 포위하도록 한 후에 거세게 공격하였는데, 곤양성에 있던 녹림병들이 두려워 항복하려고 하였지만, 왕읍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이 유수는 각지에서 병사들을 모아 돌아왔으며, 바깥쪽에서 신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두들겼다. 왕읍이 유수를 견제하기 위해 보낸 소부대들은 계속해서 각개격파 당했으며, 유수는 아군이 완을 함락시키고 구원을 오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아군을 독려하며 적의 기세를 꺾으려 들었다. 마침내 본대가 공격당하고 곤양성에서도 수비대나 성 밖에 나와 반격을 시작하자 신나라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흩어졌으며, 도주하던 신나라 군대는 때마침 내린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추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곤양 대전'에서 패한 왕읍이 낙양에 돌아갔을 때는 겨우 수천의 군사만 남았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인해 신나라의 기운은 완전히 쇠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신나라의 관료들을 살해하고 경시제의 한나라에 합류할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녹림군의 분열

녹림군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경시제와 녹림군의 수장들은 심기가 좋지 못했는데, 이 승리로 인해 유수와 유연 형제의 명성은 날로 커졌고, 곧 녹림군 내부에서 정치싸움이 시작되게 된다. 경시제와 그 측근들은 유수와 유연 형제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유연의 부장 '유직'이 경시제가 내린 관직을 사양하면서 그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유직은 본래 경시제를 옹립할 때부터 반대했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경시제가 그가 세운 군공을 치하하기 위해 항위장군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사양한 것이다. 경시제는 이를 빌미로 유직을 체포하여 처형하려고 하였는데, 유연이 나서서 이를 감싸다가 둘 모두 처형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수는 이러한 처사에 항의하지 못했는데, 그는 형이 처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시제를 알현하여 사죄를 청했으며, 상복을 입지도 않고 조문하러 찾아온 유연의 부하들과도 사담을 삼갔다고 한다. 결국 경시제는 유수를 처분할 명문을 찾지 못했고, 유수는 파로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무신후로 봉해졌다. 이후 녹림군은 낙양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장안으로 들이쳤고, 왕망을 잡아 처형하고 신나라를 멸망시켰다. 경시제는 낙양의 궁궐을 수리하고 수도로 삼았으며, 각지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에 합류하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적미군이 세력을 온건히 유지하고 이었으며, '외효'나 '공손술' 같은 군벌들도 건재하였기 때문에, 진심으로 경시제의 한나라를 따르는 이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또 하북에는 동마적, 우래적, 오교적, 단향적, 대창적 등 수십 개의 도적떼들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고, 이에 경시제는 유수를 보내 이를 추스르게 하였다. 이는 유수에게 경시제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경시제는 이를 이용해서 유수를 처분할 생각을 하였는데, 유수는 조정의 지원을 별로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태로운 행보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시기 하북에서 '왕랑'이란 자가 스스로를 '성제'의 아들 '유자여'라고 주장하며 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하북의 여러 군현에 자신을 따를 것을 조용하면서, 조정에서 보낸 유수의 몸에 큰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결국 유수는 경시제와 왕랑에게 양쪽에서 견제를 받으며 매우 곤궁한 상황에 빠졌는데, 한 번은 객관의 관리를 왕랑의 사자인척 속여 배를 체우기도 하였고, 들판에서 추위와 싸우면 콩이나 보리를 긁어모아 죽처럼 끓여서 먹으며 버티기도 하였다.

경시제의 몰락

유수는 왕랑에게 쫓겨 다니다 신도성에 다다랐는데, 그곳의 태수인 '임광'은 왕랑에게 협조하지 않는 자였고, 그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다시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유수는 이후 거록군을 장악하며 기세를 높였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권하였다. 또 왕랑에게 가담하고 있던 진정왕 '유양'을 끌어들여 한편으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양의 조카인 '곽성통'과 결혼하였고, 그녀는 후에 유수의 첫 번째 황후인 광무황후가 된다. 세력을 크게 키운 유수가 본격적으로 왕랑과 맞붙어 크게 몰아붙였는데, 경시제는 그러고 나서야 군대를 파견하여 왕랑 토벌을 돕게 했다고 한다. 유수는 왕랑의 장수가 있는 거록성을 포위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왕랑이 이를 기회로 보고 수만의 병사를 보내 거록성을 구원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유수가 주력군을 이끌고 구원병력을 들이쳐 패퇴시켰으며, 그대로 왕랑의 본거지인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랑은 성을 빠져나와 도주하다가 잡혀 처형되었으며, 이때 유수는 왕랑이 가지고 있던 서신들을 손에 넣었는데, 그중에는 유수 휘하의 관리들이 그를 비방하는 내용의 서신이 수천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가 이 문서들을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태워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당시 혼란한 시대에 처세술에 대해 죄를 물어봐야 반목하는 이들만 늘어날 뿐이며, 유수에게는 그들을 모두 처벌하고 나서 대신 내세울 만한 사람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을 것이다. 또 개봉하지도 않고 태워버렸는데, 비방하는 내용의 서신이 가득 쌓여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후대에 그를 찬양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유수가 왕랑을 토벌하는데 성공하자 경시제는 사람을 보내 유수를 소왕으로 봉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유수를 제거하기 위한 너무 뻔히 보이는 수단이었는데, 그는 하북이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았음을 이유로 이 명령을 거부하였고, 사실상 이때부터 유수는 표면적으로도 경시제의 한나라 세력과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시제에게는 이미 유수에게 이러한 명령을 강제할 만한 물리력도 없었는데, 사방에서 다시 경시제의 한나라에 대해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시제는 전한 말기부터 신나라까지 계속 이어진 국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고, 본래 도적이나 다름없었던 녹림군 출신의 공신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경시제는 24년 장안으로 다시 수도를 천도하였는데, 녹림군 출신의 병사들이 멋대로 자기들의 수도인 장안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결국 백성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신나라 때가 나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고, 이 와중에 적미군은 경왕 '유장'의 후손인 '유분자'를 새로운 황제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경시제도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25년에 측근들과 함께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 직후에 적미군에게 장안이 함락되면서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경시제는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한번 도주하였으나 이후 다시 돌아와 옥쇄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신나라에 이어 녹림군에 의해 고통받은 장안은 적미군에 의해 또다시 약탈과 방화에 시탈리게 되었고, 이에 장안의 백성들이 다시 차라리 경시제 때가 나았다는 말을 일삼자, 경시제는 결국 후환을 두려워한 적미군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후한의 건국과 중원 통일

한편 유수는 하북에 남은 도적떼를 소탕하고 있었는데, 하북을 평정한 그에게 부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는 세 번이나 이를 거절하였지만, 네 번째에 받아들여 황제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쇠락한 한나라를 다시 중흥시키고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후에 '광무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수는 낙양을 점령하고 그곳을 도읍으로 정해 장안을 장악한 적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경시제가 몰락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하남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또다시 군웅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할거하였다. 게다가 신나라 때부터 생겨난 수많은 도적 세력들도 건제하였기 때문에, 유수는 여러 장수들에게 군대를 주어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26년에 경시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휘하에 있던 일부 장수가 유수에게 항복하기도 하였고, 적미군이 장안을 약탈하다가 더 할게 없어지자 불을 질러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떠났는데, 유수는 사람을 보내 장안을 접수하게 하여 사당을 다시 세우고, 경시제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주게 하였다고 한다. 유수는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다독였고, 여러 반란 세력과 도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장수들을 보내면서, 자신도 직접 출병하여 난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많은 반란이 진압되거나 항복하였는데, 27년에는 후한군에 연전연패하였던 적미군도 유수에게 항복하였다. 적미군은 전한의 황릉을 도굴하고 장안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항복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하는데, 유수는 주모자들만을 처벌하고 그 외에는 모두 사면하였다고 한다. 이때 황제로 옹립되었던 유분자도 사면되었으며, 그는 후한 조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생을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외효는 '마원'과 함께 후한으로 귀순하였지만, 유순의 공손술 토벌 요청을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다. 30년 유순은 외효를 의심하여 장수들을 보내 외효의 근거지인 농도 일대에 주둔시켰는데, 외효는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외효는 반란 초기에 후한의 군대를 패퇴시키기도 하였지만, 거듭된 토벌작전에 대항하면서 소모된 세력을 복원하지 못했고, 결국 33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세력은 아들 '외순'이 이어받았지만 그도 이듬해인 34년에 항복하게 된다. 이후 지역의 이민족인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마원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이 이를 진압하였다. 외효를 격파하여 걱정거리를 덜은 유순은 본격적으로 공손술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는데, 공손술은 36년에 전투 중에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고, 후한은 성도를 함락시켜 촉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서 유순은 거병한 지 10여 년 만에 중원을 다시 통일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명군

37년 유수는 중원이 다시 통일되었음을 선포하고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전한말 이래로 이어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시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오랜 전란으로 인해 인구가 줄고 그에 따라 식량 생산량도 크게 줄었는데, 유수는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여러 차례 대사면령을 내려 농민들의 숫자를 늘렸다. 또 노비와 양민이 서로 평등하다고 선언하였으며, 매인법과 약인법을 제정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였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둔전병'을 운용하도록 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줄어든 군비만큼 농민들에게 세금을 줄여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생개혁을 이어가면서 한편으로 제후들의 권한도 손보았는데, 먼저 왕과 후들의 영지의 규모를 축소하고 제한하였다. 또 이전의 왕들을 후고 격하하여 수를 줄였는데, 이는 반란에 대한 견제책으로 생각된다. 유수는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는 등 여러 관직들을 통폐합하여 관직의 수도 줄여, 재정 낭비를 막고 통치의 효율화를 꾀했으며, 동시에 황제 권한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 외에도 낙양에 태학을 설치하여 14명의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를 진흥시켰으며, 각지에 설치된 사학에서는 현지의 학자가 문하생들에게 경서를 강의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신나라 때 틀어진 이민족들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여, 이 시기에 왜의 노국에서 온 사신에게 금인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한번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운 황제

유순은 57년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재위한 지 33년 만이라고 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보기 힘든 한번 망한 왕조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인 데다가, 일대에 중원을 통일시킨 업적도 포함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에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 그가 중원을 통일한 후에 태평성대를 가져왔다고 하여, 이를 '광무성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중원과 인접해 있던 이민족들에게는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니었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멸망시켰던 한반도 북부지역에 '낭락국'이 있던 곳이 다시 한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북 베트남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쯩' 자매는 마원에 의해 토벌되었고, 북쪽의 흉노족은 이 시기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뉘어 이후 쇠락하게 된다. 그리고 흉노족의 분열로 인해 오환족과 선비족이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이는 후에 중원의 역사에 큰 영향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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