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10대 황제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 역사
- 2023. 5. 1.
2인자 티투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는 39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아누스)로 당시 로마에서 안찰관을 지내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공직에 진출하여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공직 경험을 쌓고 있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황가의 도움도 있어 빠르게 승진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티투스도 어렸을때부터 황궁에서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꼐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때 후계자 중 한명이었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브리타니쿠스)와 특별히 친분이 깊었는데,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게 독살당할때 티투스도 같이 중독되었으며, 오랫동안 마루에 쓰러진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후 61년부터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여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 등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64년에는 로마로 돌아와서 결혼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별하였다. 이듬해인 65년에 다시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재혼하였는데, 아내가 황제인 네로와 반대되는 세력의 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피소의 음모'로 불리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강제로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티투스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67년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유대 지역의 반란 진압을 위해 시리아 속주로 향했다. 그러던 68년에 내란이 발발하여 '네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로마는 혼란에 휩쌓이게 된다. 69년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정식 황제로서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때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부재중인 유대 지역에서 로마 군단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70년에는 2년여에 걸친 전쟁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이때 예루살렘의 성전이 부서졌다. 71년에는 로마로 돌아와 대대적인 개선식을 하였는데, 81년에 이 개선식을 기념하여 '티투스 개선문'을 세웠고, 이 개선문은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다고 한다.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후계자로 '카이사르'의 칭호를 받았고, 근위대장으로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좌하였다. 이후로도 유대지역의 반란 진압은 계속되어 73년이 되어서야 거의 진압되었고, 그 사이 유대 왕가의 공주였던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황제 티투스
티투스는 황제인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 집정관 등의 공직을 지내면서 행정 경험을 쌓았고, 근위대장으로서 정통성이 부족한 '플라비우스 왕조'의 자리를 반석으로 하기 위해 정적 제거를 도맡았다. 이를 위해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후계자 시절에는 상당히 인기가 없었다. 또 이 과정에서 암살에 가까운 행위를 하거나 증거를 조작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안 좋은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즉시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이전의 공작들의 효과인지 별다른 무리없이 권력을 계승할 수 있었다. 이때 로마 시민들은 티투스의 황제 즉위에 대해서 상당히 우려하였던 것 같은데, 이는 그가 후계자 시절에 보여준 면모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이 시기 그의 애인으로 알려진 베레니케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제2의 네로가 되지 않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티투스는 베레니케와 결혼하는 것을 포기하였고, 이러한 소식은 오히려 티투스에게 연모를 일으켜 로마 시민들에 대한 그의 인기가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티투스는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후계자 시절과 정반대로 많은 이들에게 지지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재위 기간동안 큰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시'가 완전히 메몰되었고, 인근 도시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전염병이 퍼지기도 하였다.
사망과 승계
티투스는 황제로서 이러한 재난 상황을 수습하느라 쉴 겨를도 없이 바빴을 것이다. 결국 겨우 통치 2년만에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이렇게 빨리 사망하고 동생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티투스를 암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티투스는 이렇게 짧은 기간 밖에 통치하지 못하였으며, 또 통치 기간 동안 재해와 재난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통치 자체는 선정을 베푼것으로 평가된다.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재해와 재난에 대한 지원과 구호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지만, 반대로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대책들에 매진하는 황제의 모습에 호감을 가졌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티투스의 평가 때문에 이후 집권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평가에 더 안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