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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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 바르카

시칠리아 전쟁의 시작

'카르타고'는 현재의 '튀지니' 지역을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한 국가로, 북아프리카 일대의 넓은 평원에서 작물을 농업과 지중해를 무대로 해상무역을 하는 상업이 발전한 국가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그리스 헬레니즘 세계가 쇠퇴하면서 떠오른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는 국가였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거의 평정하고 있었는데,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에서 충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 패권을 두고 다투는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총 3회 충돌하였는데,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 사이에 20년에 걸쳐 싸우게 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는 섬으로, 당시 북아프리카 쪽인 섬의 서쪽은 카르타고의 영향아래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 쪽인 동쪽은 그리스인들의 도시가 있었다. 전쟁은 당초 그리스인들의 도시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서 발생하였다. '시라쿠사' 그리스인들을 따르던 이탈리아계 용병들이 섬의 서북쪽 끝에 있는 같은 그리스인들의 도시였던 '메시나'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시라쿠사의 그리스인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탈리아계 용병들은 같은 라틴족이라는 이유로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로마는 범죄자인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려 하였으나, 카르타고의 세력확장을 우려하여 출진하게 된다. 당시까지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 관심사가 달라 충돌하지 않았는데,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압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이 존재하지 않았고, 카르타고는 해상무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와 다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마의 파병을 알게 된 시라쿠사에서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합하는 동안 얻은 많은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시라쿠사를 로마의 속국형태로 만들었다. 이에 시칠리아의 패권에 위협을 느낀 카르타고는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당시 로마는 시칠리아의 육지에서는 카르타고를 상대로 대단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지만, 카르타고의 주력인 해군을 격파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로마 사상 최초로 해군을 창설하게 된다. 로마해군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발상으로 카르타고의 배를 묶어서 해상에서 마치 육상전투를 하는 것처럼 백병전을 벌여서 승리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본토를 공격하는 등 대담한 전술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인 항해기술의 부족과 로마 군함의 기술적 결함으로 인해, 폭풍을 만나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결국 지상에서는 로마가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재해권은 카르타고가 가지고 있는 상태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지속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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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 바르카

'하밀카르 바르카'는 기원전 2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료에 따라 카르타고 본국이 아니라 '키레나이카'의 '키레네'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가 참전하기 전까지의 기록은 남아있는게 없으며, 기원전 247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카르타고는 국내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해외에서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분쟁하고 있었다. 카르타고에는 주로 징집병이 아닌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자국 내 내정을 중요시하는 파벌은 전쟁으로 인해 낭비되는 국력을 우려하였고, 군사를 중요시하는 파벌은 시칠리아를 포기함으로써 시칠리아의 농지와 더불어 지중해 무역거점의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분쟁은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육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시칠리아에 파견되었으나, 병력의 질이나 숫자 면에서 로마군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되지 않았다. 하여 방어전으로 방향성을 굳힌 하밀카르는 로마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에릭스 산'에 농성하여, 산과 도시 사이에서 서로 호응하여 로마군이 함부로 공격하기 어렵게 견제하였다. 로마군은 하밀카르를 상대로 더 이상 지상에서 승리가 어렵게 되자, 다시 한번 해상으로 눈을 돌렸다. 로마는 재편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이미 전쟁을 계속 수행할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하밀카르는 이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만 결국 종전 협상을 하기 위해 로마의 협상장으로 향하게 된다. 이 협상으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을 약속하였으며,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섬인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권리도 포기하게 된다.

포에니 전쟁 후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을 이유로 참전했던 용병들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용병들이 리비아인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밀카르가 그 반란을 진압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지만, 반란 세력중 일부가 이반 하면서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과 반란 진압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정치적인 견제를 심하게 받았기 때문에, 수도에서 먼 '히스파니아 지방'(현재의 이베리아 반도 일대)을 평정하러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는 현지 원주민들을 포섭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히스파니아 지방을 카르타고의 영향권 안에 포함시켰다. 동시에 히스파니아 지방에서 바르카 가문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는데, 사실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멀리 떨어진 히스파니아 지방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정복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그중에는 가문의 이름을 딴 '바르셀로나'도 있다. 하밀카르 본인은 원정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원정은 사위였던 '하스드루발'에 의해 계승되어 '카르타고 노바'(현대의 카르타헤나)를 건설하는 등 에브로 강 이남에서 카르타고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하밀카르는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아들인 어린 '한니발 바르카'에게 로마에게 복수하겠다는 신의 맹세를 시켰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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