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명장, 이탈리아의 방패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역사
- 2023. 1. 16.
로마의 명문 파비우스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대대로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을 역임했던 귀족가문인 파비우스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다지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명문가의 자제로서 여러 공직의 단계를 거쳐,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서 집정관에까지 선출되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단초가 되는 '사군툼' 함락을 계기로 하는 로마의 '카르타고'에 대한 선전포고 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217년에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북부로 쳐들어왔고, 이어진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로마 군단이 패배하면서 로마는 본격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한니발에 대항하게 하였다.
로마의 굼벵이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한니발 타도를 요구 받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였지만, 그는 당시 로마에서 현재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전면전에서 로마 군단이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한니발이 현재 로마 군단보다 강하지만, 동시에 적지에 홀로 쳐들어와서 제대로 된 보급이나 지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될 수 있는 데로 한니발이 물자를 얻지 못하도록, 마을을 소개하거나 식량이나 식수가 될 수 있는 것 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또한 한니발이 이끄는 부대와는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동맹 도시가 공격당하더라도 한니발이 있으면 견제만 할 뿐 덤비지 않았다. 반대로 한니발이 없는 곳에서는 활발하게 전투를 진행하여, 카르타고 부대를 소모시키고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도시들을 되찾아오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까지 그러한 소극적인 전술을 이해하고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싸움을 피하고 한니발에게서 도망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보고 '쿤크타토르'(굼뜬 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의 전술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로마 원로원에 의해 사실상 지휘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칸네의 전투와 이탈리아의 방패
로마 평민들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기득권 층이 일부로 한니발을 피해다니면서 전쟁을 끌어, 그 사이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이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 시민들은 카르타고에게 패배한 채로 끌려다니는 듯이 진행되는 전쟁의 분위기를 바꾸길 원했고, 원로원은 대규모 로마 군단을 편성하여 한니발과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였다. 대규모 군단은 괴멸되었고, 한니발에게 잡힌 포로 숫자만도 일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도 로마 뼈아픈 패배 앞에서 당황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로마 시민들은 결국 '파비우스 전략'을 받아들였다. 로마 시민들 중 그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하였고, 로마 군단은 남은 전쟁기간 동안 파비우스 전략으로 한니발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한니발은 그동안 한 번도 로마 도시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 한니발의 부대의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포에니 전쟁 동안 수많은 로마 군단이 동원되어 로마 내외부에서 싸우는 동안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한니발이 없는 전장에서의 승자는 거의 항상 로마 군단이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입장에서는 로마를 직접 공격하다가 군단과 협공에 당하는 위험보다는, 전쟁이 길어지더라도 차근차근 로마 주변의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켜, 로마 그 자체를 축소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군단의 위력은 명불허전이라, 한니발이 하나하나 지워나간 로마의 흔적들을, 그가 없는 곳에서 더 많은 숫자의 로마 군단들이 다시 로마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끝내고, 한니발을 '자마 전투'에서 물리친 것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지만, 전쟁 기간 동안 로마를 지킨 것은 바로 파비우스 막시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적으로 그는 로마 시민들의 존경을 받아 '이탈리아의 방패'라고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