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21대 황제, 잔인한 폭군 「카라칼라」
- 역사
- 2023. 2. 22.
정통성 없는 황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로 188년에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의 '루그두넨시스'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에는 동생인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가 태어났고, 193년에 '다섯 황제의 해'가 시작되자, 아버지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황제를 참칭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5년 자신의 황제자리에 걸림돌이자,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가이우스 페르켄니우스 니게르'를 물리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들의 황제 자리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했다고 하며, 아들인 바시아누스의 이름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개명하게 하였다.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8년에 막 10살이 된 바시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부여하고,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정식 후계자로 삼았다. 결국 그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는데, 로마 시민들은 그들 가족의 정통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이름인 바시아누스라고 부르거나 별명인 '카라칼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당시 갈리아식 의복이었던 '카라칼루스'에서 따온 것인데, 그가 카라칼루스를 직접 디자인하여 입고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물론 로마에서 딱히 황제가 혈통적 정통성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베루스 부자는 로마 군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제시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곧바로 숙청되었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서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초대 로마 황제로부터 이어받는 혈통적 정통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상당히 미묘한 문제이다.
잔인한 성격과 형제간의 반목
카라칼라는 어렸을때 친절하고 유순한 성격이라고 묘사되어있는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점점 충동적이고 잔혹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마치 로마의 유명한 폭군으로 묘사되는 '네로' 황제나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경우 유소년기에는 좋은 성격이었지만, 병을 앓고 나서, 혹은 암살 시도를 겪고나서 폭군이 되었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각색된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카라칼라와 동생 게타는 차기 황제로서 어렸을때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공직을 거쳤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로부터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병사들을 소중히 할 것을 교육받았다. 카라칼라는 202년 14세의 나이로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친척이기도 한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였는데, 사실상 정략결혼이기도 한 이 혼인을 카라칼라는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는 당시 로마에서 상당히 평판이 안 좋았는데, 황제의 신임을 받는 근위대장으로서 권력과 무력을 이용하여, 상당히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일삼았고, 거만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결국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는 반역죄로 고발당하였는데, 카라칼라가 마음에 안드는 장인과 아내를 처분하기 위해서 고발을 지시했다고도 하고, 또는 권력에 취한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직접 황제가 되기 위해 진짜로 음모를 꾸몄다고 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숙청되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카라칼라는 아내인 플라우틸라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황제 부부는 그녀를 '리파리 섬'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아내를 잊지 않고 있다가 단독 황제가 되자 사람을 보내어 살해하였다. 208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두 아들을 대동하고 직접 '칼레도니아' 지역(현제의 스코틀랜드)으로 원정을 떠났다. 주된 명분은 칼레도니아 지역을 정벌하여 '브리타니아' 속주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사이가 안 좋은 형제를 화해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황제의 후계자이자 형제로 당시 정통성 없는 세베루스 왕조에서는 서로서로 의지했어도 모자랄 정도였지만, 상당히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원정 당시에도 서로 한 막사에 같이 있지도 않을 정도로 싫어하고 미워하였다. 이런 아들들을 걱정한 황제는 전쟁터에 데려와서라도 사이를 주선해주려고 했던 것 같지만, 형제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카라칼라는 당시에도 군사적으로 상당히 재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이 원정 자체에도 흥미가 없었던 것 같고, 그저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는데에만 치중하였고, 일설에 이하면 병든 아버지가 빨리 죽기만을 바라거나, 혹은 사고를 위장하여 직접 손을 쓰려고 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카라칼라가 폭군으로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의심해 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결국 3년여에 걸친 긴 원정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원정지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황제는 죽음을 앞두고도 형제에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 살해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카라칼라와 게타는 공동 황제로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에도 형제간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져 있었다. 두사람은 로마 제국을 둘로 나누어 가지려고 했었던 것 같으나, 주위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결국 일년도 지나기 전인 그해 겨울 카라칼라는 게타를 황궁의 어머니 앞으로 불러내어 암살하였다. 카라칼라는 어머니 앞에서 동생 게타를 직접 살해하였으며, 근위병을 이용하여 그와 함께했던 지지자들까지 모두 살행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은 카라칼라는 원로원을 이용하여 동생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렸으며, 게타의 친구들과 지지자들도 색출하여 제거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내려가는 것을 우려하여, 군인들의 연봉을 올려주어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게타는 형인 카라칼라의 손에 죽음으로 인해 역사가들에게 동정받았지만, 반대로 카라칼라는 완전한 폭군으로 확실히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리한 정책은 제국의 재정에 압박을 가져오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칙령과 카라칼라 목욕탕
카라칼라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급히 일부 세금을 인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여, 화폐의 은 비중을 낮추는 식으로, 말 그대로 돈을 늘렸다. 뿐만 아니라 '안토니누스 칙령'도 발표하였다. 이것은 카라칼라가 개명하면서 안토니누스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이 칙령으로 로마 영토내에 있는 자유민들은 모두 로마 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에 사는 모든 자유민이 동등한 권리를 갖게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민주적이고 공평한 칙령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단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시민의 숫자를 늘린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또 '카라칼라 목욕탕'을 건설하기도 하였는데, 건설에 착수한 것은 아버지 대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이나, 카라칼라의 통치시기에 완공되었다. 이 목욕탕은 상당히 엄청난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시설이었던 것 같은데, 도서관이나 극장 등도 병설되어있다고 한다. 또 카라칼라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군인들이나, 아첨하는 무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멧돼지 100마리를 활이나 창, 칼로 사냥하는 묘기를 보여주거나 전차 기수로 대뷔하는 등 마치 콤모두스 황제가 했던 것 같은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치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나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부자들을 협박하여 재산을 빼앗았고, 기분에 따라 사람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등,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멈출줄 몰고 하락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더 병사들의 인기에 기댈 수 밖에 없었고, 그를 위해 병사들의 급료를 인상하는 등 선심성 정책을 시행하였다. 카라칼라는 군사적 재능은 상당히 뛰어났는데, 213년 '게르마니아' 지역으로 원정을 나가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전쟁에 승리하였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이듬해인 214년에는 다시 동쪽으로 떠났다. 자신을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옛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곳에 머무르면서, 마케도니아식 복장을 입고 태양관을 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여정을 따라 그리스와 소아시아지역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215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몇가지 기행을 일삼은 것 외에는 큰 문제는 없었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안렉산드로스 대왕이 만든 도시들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당시에는 인구가 50만에 이를 정도의 대도시였다. 그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일부 시민들이 카라칼라 황제를 모욕하였고, 이에 카라칼라는 그들을 잘 달래 한곳에 모이게 한 후에 병사들을 시켜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알렉산드리아 일대에서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희생자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카라칼라가 동부로 온 이유 중에는 파르티아 원정을 염두해 둔 것도 있었다. 당시 파르티아는 '볼로가세스 6세'와 '아르타바노스 4세'가 서로 실권을 잡기위해 싸우는 중이었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아르타바노스 4세의 딸과 혼인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게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원정도중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217년 사소한 이유로 백인대장 둘을 처벌하였는데, 그 중에 한명이 앙심을 품고 카라칼라를 암살하였다고 한다. 이 암살에는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가 가담했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후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자리에 취임하였다. 근위대에 의해 로마에 큰 혼란이 지나간지 겨우 24년만에, 다시 한번 근위대에 의해 황제가 암살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위대장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