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시대 현종의 환관 「고력사」
- 역사
- 2023. 10. 9.
왕족의 후예에서 환관으로
고력사(高力士)는 690년경 중국의 당나라에서 태어났는데, 고주 양덕현 출신이다. 고력사의 본명은 '풍원일'로 본래 북연의 왕족의 후예라고 하며, 당나라에서도 대대로 벼슬을 하며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인 '풍군형'이 죄를 저질러 가산을 몰수당했다고 한다. 이때 고력사는 10살 남짓한 나이였는데, 그는 노비가 되어 거세되었으며, 이내 환관으로 궁으로 보내졌다. 고력사는 환관이 되면서 개명하게 되었는데, 그가 궁으로 들어갈 때 다른 환관과 함께 '금강역사'에서 이름을 따와 지어졌다고도 하고, 당시 황제였던 '측천무후'가 그렇게 지었다고도 한다. 어느 게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궁에서 환관 선배인 '고연복'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에게 고씨 성을 받았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고력사는 키가 195Cm 정도였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로 개명을 했던지를 떠나서 상당히 어울리는 이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고력사는 후에 '현종'이 되는 '이융기'의 수발을 들도록 배치된 것 같다.
현종의 측근
당시 당나라는 태평성대와 혼란이 함께한 시기로, 실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자신의 삼남 '이현'을 황제로 세워 '중종'으로 세웠다가 폐위시키고, 다시 사남인 '이단'을 '예종'으로 세웠는데, 결국 황제의 자리를 넘겨받아 '무주'를 건국하고 본인이 직접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정치권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반대로 백성들은 측천무후의 치세 아래에서 태평성대를 노래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705년 '신룡정변'을 통해 무주가 멸망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순서에 따라 중종이 다시 복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예종과 그 아들인 현종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당나라 조정의 혼란은 끝나기는커녕 이제 시작이었다. 중종의 황후 위씨와 딸 '안락공주'는 측천무후의 행동을 보면서 그녀를 일종의 롤모델로 삼아 자신들도 권력을 장악할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710년에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 중종을 독살하는 사건을 벌이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현종은 측천무후의 딸인 '태평공주'와 함께 '당륭정변'을 일으켜 위씨 외척들과 무씨 일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아버지 예종을 다시 황제로 세웠는데, 이때 환관으로 궁궐 내에 있었던 고력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712년에는 예종이 현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는데, 이번에는 태평공주가 정치적으로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이듬해인 713년에는 '선천정변'을 일으켜 태평공주와 그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였는데, 당시 사실상 환관들을 장악하고 있던 고력사는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앞장섰다고 한다. 이처럼 고력사는 현종이 정권을 잡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고, 이 때문에 현종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았는데, 현종은 고력사가 자신을 지킬 때만 느긋하게 잠을 청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당나라 조정에서 고력사의 위치는 엄청났던 것 같은데, 많은 고관대작들이 고력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고, 유명한 간신인 '이임보'와 '양국충'도 고력사 덕분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황족들도 고력사를 보고 고력사왕 이라거나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아첨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력사는 대단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리사욕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정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위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가 쌓여 웬만한 왕들 보다도 재산이 많았다고 한다.
현종의 몰락과 최후
현종은 '개원의 치'로 대표되는 태평성대를 이루어냈지만, 점점 실정을 거듭하게 되었고, 결국 '천보난치'라는 악평을 듣게 된다. 여기에는 간신인 이임보와 양국충, 경국지색이라는 '양귀비', 반란을 일으키는 '안녹산' 등의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당나라 조정에 등장하는 데는 하나 같이 고력사의 입김이 작용하였다. 고력사는 현종을 위해 충실히 일하는 충신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종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당나라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고력사는 조정의 실권을 손에 쥐고 있던 환관 중에서는 드물게도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등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당나라에 위기를 가져온 것이 고력사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게 된 셈이다. 결국 755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낙양이 함락당했으며, 이듬해인 756년에 현종은 난을 피해 수도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난 가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도 고력사는 현종과 함께 했으며, '마외병변'으로 간신 양국충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자,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귀비도 죽게 해야 된다고 진언한 것도 고력사였다고 한다. 이후 난은 진압되었지만, 현종은 퇴위하고 '숙종'이 그 뒤를 이었는데, 숙종의 휘하에서 실권을 잡은 환관 '이보국'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현종을 유폐시키면서 가장 먼저 고력사를 유배 보냈다고 한다. 고력사를 시작으로 당나라에서는 환관들이 조정에서 실권을 잡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그러한 흐름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배제된 것이다. 이후 고력사는 72세의 고령이 되어서야 다시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때 현종은 이미 사망한 후였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크게 슬퍼하면서 7일간 식음을 전폐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