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시대 지중해의 패권다툼 「제1차 포에니 전쟁」
- 역사
- 2023. 1. 8.
페니키아인들의 국가 콰르트하다쉬트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경에 현재의 튀니지 부근에 세워진 페니키아의 도시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원래 동 지중해의 해안인 현재의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 북부에 살았는데, 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항해술이 뛰어나 동 지중해에서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페니키아인들은 인류 최초로 알파벳을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650년경에 페니키아로부터 독립해서, 북아프리카 일대와 이베리아 반도 일부, 그리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섬의 일부를 영토로 하며 지중해 연안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이 부르는 말로, 원래 페니키아 말로는 '콰르트하다쉬트'이며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걸쳐있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했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하는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가문들 사이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두 명의 행정장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백인회, 민회 등을 통해서 국가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과두제'로서 로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직접 군에 종사하는 징병제였던 그리스나 로마와는 다르게 용병을 고용하여 군대를 유지하였다. 카르타고는 서 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이었으며, 주로 상업귀족 세력이 국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고,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같은 상업상의 라이벌이었던 그리스계 도시들과 지중해 무역을 통해 경쟁하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
로마는 건국으로부터 약 500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에트루리아인'들과 분쟁하였으며, 다음에는 다른 라틴계 도시들을 흡수하고, 도중에는 '갈리아족'의 침공에 한때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후 '삼니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피로스 전쟁'을 거쳐 명실공히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의 성장은 동시에 걱정거리를 가져오게 되는데, 더 이상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성장할 곳이 없다는 것과, 피로스 전쟁에서 처럼 이탈리아 반도 밖의 세력의 개입에 대한 우려였다.
시칠리아 섬
'시칠리아' 섬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인 '칼라브리아 반도'와 좁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이다. 당시 시칠리아는 섬의 서편은 카르타고의 영향권 안에 있었고, 동편은 그리스계 도시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 충돌할 일이 없었는데, 먼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륙에서만 활동하였고, 카르타고는 해상무역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시칠리아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들이 완충지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완충지대에서의 분쟁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개입하게 되면서 두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게 된다. 당시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국가 중에서 '시라쿠사' 가장 컸는데, 이 시라쿠사의 왕 '아가토클레스'는 남부 이탈리아에 살던 라틴계 용병인 '마메르티니인' 고용하고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아가토클레스 왕 사후 근거지도 없이 떠돌던 마메르티니인들이 메시나 해협 근처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인 '메시나'를 점령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마메르티니인들은 메시나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였고, 이에 주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메시나를 공격했다. 메시나는 로마와 동맹관계는 아니었는데, 같은 라틴계 국가였기 때문인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처음에 구원을 망설였는데, 이는 당시 통일한 이탈리아 반도 내의 안정이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라틴계인 마메르티니인은 필연적으로 남부 이탈리아를 전쟁으로 점령한 로마의 구적이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마메르티니인들이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고 메시나를 근거지로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로마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곧 메시나가 카르타고에도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를 구실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 전역을 영향권 안에 넣을 것을 우려한 로마는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본도 사이에 있는 메시나 해협은 가장 가까운 곳이 1.8Km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섬 전체가 카르타고의 영향권안에 들어가게 되면 남부 이탈리아 해안 전체뿐만 아니라 로마의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로 카르타고가 진출하기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264년 원로원은 메시나 보호를 위하여 집정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를 파견하였다. 로마는 메시나를 보호해 주는 대신, 메시나를 로마의 세력권 아래 두었고, 로마의 시칠리아 섬 진출을 불쾌하게 여긴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와 동맹하여 메시나를 공격했다. 카르타고 동맹군을 격파한 로마는 먼저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는데, 카르타고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던 시라쿠사는 로마와 동맹하면서 일선에서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로마와 카르타고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고, 곧바로 시칠리아섬 서부의 카르타고군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겨울이 되면서 일단 전쟁은 잠시 멈추게 된다. 고대 국가의 군대는 병사이면서 동시에 농민이기도 했기 때문에 밀의 파종 등의 이유로 겨울에는 관례적으로 전쟁을 멈추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집정관은 임기가 1년이었기 때문에 집정관 교체로 인한 부재가 종종 일어나게 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들도 시행하고 있다. 집정관은 이제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와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바뀌었는데, 오타킬리우스는 사실 요전까지도 전쟁하고 있던 삼니움족 출신이다. 로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는데 이는 로마가 제국으로 커질 수 있었던 하나의 요소일 것이다. 로마는 메시나와 시라쿠사를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둠으로서 시칠리아 동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는 이로서 전쟁을 끝내고 싶었겠지만,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동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 '아그리겐툼'(현재의 아그리젠토)에 대로마 전진기지를 세웠다. 하지만 로마는 이 소식을 듣고 기원전 262년에 집정관인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와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가 각각 2개의 군단인 4만여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으로 다시 상륙하였다. 이에 아그리겐툼을 카르타고의 지휘관은 근처의 용병들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하고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아그리겐툼은 포위되었지만 로마 군은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였고 그해 겨울 카르타고에서 5만명 이상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유명한 '아그리겐툼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는 아그리겐툼이라는 군항을 확보하였으며, 시라쿠사와의 동맹이 확고함을 재확인하였다.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이루어진 첫 대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는 시칠리아 동부 로마 권역의 안정과 전쟁에서의 자신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로마의 첫 해군
로마는 육지에서의 전투는 카르타고를 압도하였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수성에 능한 그리스인이 지키는 성은 공략하기 어려웠으며, 끊임없이 바다를 통해 물자와 병력을 보급받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 싸움을 치렀지만 이제 지중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해군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로마는 해상전의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배의 건조기술 자체도 카르타고에 뒤지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처음부터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시 로마의 기술력으로는 3단노선 밖에 만들 수 없는데 비해 카르타고는 5단 노선까지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로마는 노획한 카르타고의 선박을 분해해 재조립하는 방식을 이용하였고,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들의 협력을 얻어 해군을 조직하게 된다. 기원전 260년 로마는 125척의 함선을 건조하여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를 사령관으로 첫 함대를 지위하게 하였는데, 해전 경험이 전무했던 로마 군단은 리파리 제도에서 카르타고의 함대를 상대로 제대로 대항도 못 해보고 패배하게 된다. 이때 지휘관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원래 육군을 지휘할 예정이었던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네포스'에게 해군의 지휘를 맡기게 된다. 이때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두일리우스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로마군은 육상에서의 싸움은 잘 하지만 해상에서의 싸움을 잘 못 하는 점을 생각해서, 해상에서도 육상에서처럼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배를 개조한다. 바로 '코르부스'라는 자유자재로 회전이 가능한 임시 부교를 갑판에 설치하고, 원거리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장치들을 몇 가지 고안했다. 로마 해군의 해전 실력을 얕보고 있던 카르타고 함대는 기원전 260년 '밀레 해전'에서 로마의 신병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이후 기원전 256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도 로마 함대에 대패하면서 한동안 재해권은 로마로 넘어가는 듯싶었다. 재해권을 장악하면서 아프리카 본토에 상륙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압박하면서 시칠리아, 사르데나, 코르시카의 3개 섬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지만, 카르타고는 과중한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어 거절하고,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인 '크산티포스'를 고용하고 그에게 지위권을 일임하였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크산티포스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대승하였고, 로마 군단을 지휘했던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포로로 붙잡히게 된다. 지휘관을 잃은 로마 군단은 함대를 이용하여 시칠리아로 후퇴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시칠리아 남부 해안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로마의 신무기였던 코르부스는 무게가 무거워 배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는 결함이 있었는데, 폭풍으로 인한 강한 풍랑을 견디지 못하고 배가 좌초되어 철수하던 함대의 3분의 2정도가 좌초되었고 희생자가 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같은 해 겨울 포로였던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의 사자 신분으로 로마에 왔고, 강화 조건은 시칠리아 섬 전체를 카르타고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굴루스는 원로원에서 카르타고에 철저한 항전을 주장하며 자신의 명예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협상은 부결되었고 레굴루스는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가서 처형되었다. 이후로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다시 아프리카에 상륙하기 전까지 카르타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카르타고의 패배
카르타고는 실로 엄청난 행운으로 인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지만, 내부의 분쟁으로 인해 그 기회를 놓치게 된다. 로마와의 분쟁은 해상무역을 하는 재해권에 민감한 상인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아프리카 북부의 대농장을 운영하는 지주들은, 그들 때문에 막대한 국고가 전쟁에 소모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안전한 본토에 있던 자신들까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로마 군단이 본토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본 '리비아인'이나 '누미디아인'들이 카르타고의 지배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하여 반란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사이 로마는 레굴루스의 독려를 받아 물심양면으로 재건에 주력하였다. 기원전 254년 리파리 제도 해전에서 한 번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스키피오 아시나는 육군과 해군의 합동 작전으로 시칠리아 북부에 있는 '파노르무스'(현재의 팔레르모)를 함락시켰다. 이 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하여 많은 도시들이 로마에 항복하였지만, 로마는 또 한번 폭풍에 휘말려 300척의 함대에서 150척가량이 침몰하면서 흔들리게 된다. 로마는 급하게 코르부스를 철거하면서 함대를 재편하였지만, 카르타고는 이미 130척의 함대를 이용하며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상륙하였다. 카르타고는 대규모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서 파노르무스를 재탈환 하기 위해 나섰다. 로마 병사들은 거대한 코끼리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두려워하였다. 이에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몸이 날랜 경보병과 투창병만을 성밖으로 내보내 코끼리부대를 집중공격하게 했다. 투창세례를 받은 코끼리들이 통제를 잃고 카르타고의 전선을 짓밟아 무너트렸고, 이틈에 로마 군단병이 성에서 출전하여 전투에서 대승하게 된다. 이후로 카르타고는 육지에서 로마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군의 도시 공략은 더디고, 카르타고군은 정면 대결을 회피하며 배를 타고 다니면서 로마군의 보급선을 끊고 약탈을 하며 다녀, 로마군은 다시 한번 해전을 통해 재해권을 확보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레 기원전 249년 로마의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로마 함대를 재정비하고 드레파나에 있는 카르타고 함대를 기습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출정한 로마 함대에게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먼저 잦은 해난 사고의 위험 때문에 코르부스가 달려있지 않다는 점과 아직도 카르타코 함대에 비하면 로마 함대는 항해술이 한참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드레파나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대배하였으며,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로마로 소환되어 패전의 책임에 대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 로마에서는 전체 인구가 감소되었다고 할 정도니 긴 전쟁으로 인한 피폐를 알 수 있다.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에서는 '하밀카르 바르카'가 시칠리아로 파견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카르타고에서는 반전세력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 본국에서의 대대적인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하밀카르는 로마군과 대대적인 전투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해상 보급을 받으며 산에 주둔하면서 도시와 호응하여 로마군을 견제하였다. 지난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로마는 사실상 함대 재건을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상에서도 하밀카르에 의해 승기를 잡기가 어려워지자, 다시 함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의 로마 함대와는 조금 달랐는데, 그동안의 항해 경험과 패전의 경험을 되살려 배를 개선하고 훈련도 수시로 하였다. 반대로 카르타고에서는 5년간 하밀카르가 육상에서 시간을 끌며 로마군을 괴롭히는 동안 본국에서는 전쟁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함선은 방치되어 손상되어 있었으며, 승무원조차 모잘라 죄수를 데려다 급조해야 할 정도였다. 로마 함대의 출현으로 카르타고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지원군이 도착하는데만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기원전 241년 시칠리아의 '아이가스테 제도'에서 이번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해전이 펼쳐지게 된다. '아이가스테 해전'에서 패배하여 시칠리아의 재해권을 완전히 잃은 카르타고는 더 이상의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고 로마에 패배를 인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 섬뿐만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까지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시라쿠사는 긴 전쟁동안 로마의 동맹으로서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한동안 로마의 특별대우를 받게 된다. 하밀카르는 포에니 전쟁동안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만 본국인 카르타고로 후퇴하게 된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
전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상당히 잃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용병들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다가, 반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밀카르는 정치적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 또한 카르타고의 잃어버린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로마는 지중해의 막강한 해상세력이었던 카르타고를 물리치면서 해상을 통해 패권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얻어냈다. 또한 시칠리아에서 재배되는 풍족한 곡물을 공급받아 로마의 식량사정은 크게 개선되었다. 언뜻 보면 이 전쟁의 승패의 원인은 로마는 단결하여 버텼다는 것이고, 카르타고는 분열되어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 로마는 많은 재난으로 상당한 국력을 소모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기 때문에 함부로 결론 낼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