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22대 황제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
- 역사
- 2023. 2. 23.
황제가 된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는 165년 로마의 북아프리카 지역 속주에 있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현재의 셰르셸)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류층이 평민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어린시절 변호사 수업을 받아 변호사로 일하다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근위대장이었던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자리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마크리누스가 말석이지만 처음으로 황제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는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 밑에서 일하면서 로마의 지도층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윽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행정관료에 임명되어 출세를 시작하였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후계자인 차기 황제 '카라칼라'의 심임을 받아 212년에는 근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카라칼라의 동방원정에도 함께하게 된다. 카라칼라는 이 '파르티아' 원정 중에 암살 당했는데, 황제 암살은 마크리누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설과, 암살자들이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하고 마크리누스를 새 황제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 맞든 다음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되고, 마크리누스가 병사들에 의해 새 황제로 추대되면서, 제대로 된 로마의 공직 겸험을 쌓지도 않았고, 원로원 의원 경력조차 없는, 근위대장 출신의 황제가 탄생하였다. 카라칼라 황제는 자식도 없었을 뿐더러 미리 지명한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험없는 황제와 파르티아
정통성 없이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나,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 군단의 병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전임 황제는 로마 시민들이나 원로원에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단을 등에 엎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의 실정이나 폭정에도 반대세력의 본격적인 견제가 어려웠고, 또한 그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도 꾸준히 펼쳐왔다. 따라서 새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도 병사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 있었는데, 황제 취임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는 전쟁 중 이었기 때문에, 그는 조급한 마음에 실수를 하고 만다. 마크리누스는 황제가 되었음에도 원정 중이었기 때문에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전에도 전선에서 황제가 된 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마크리누스는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시급히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정식으로 황제로 인정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전투'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서로 큰 피해만 입었을 뿐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을 정도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 황제의 사망을 빌미로 파르티아와 평화 협상을 맺었는데, 로마에 매우 불평등한 조건으로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그의 병사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급락하게 되었다. 조급한 마크리누스의 상황을 알리없는 로마의 병사들은 사실상 패배에 가까운 협상 내용에, 마크리누스를 전쟁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로 생각했다. 이로인해 마크리누스는 사실상 지지자가 없는 황제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크리누스는 황제가 된 후에 병사들의 급료나 특권을 일부 조정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이점이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짜 후계자의 등장과 실각
카라칼라 황제가 동방 원정을 할때, 자신의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이사' 등이 동행했었다. 이 때문에 마크리누스는 암살당한 전 황제의 가족들을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게 '안티오키아'에 억류하고 있었는데, 사실상 모든 권력과 재산을 다 빼앗기게 생긴 율리아 돔나는 원한을 가지고, 스스로 굶어서 죽게 된다. 사실 그녀는 아들 카라칼라 전 황제의 측근들과 몇가지 음모를 모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또 다시 커다란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모든 것을 잃게된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딸들은 율리아 돔나가 사망하자, 고향인 '에메사'로 이동하였는데,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들은 작당 모의하여, 율리아 마이사의 손자였던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가 사실 카라칼라 황제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마크리누스 황제의 약점이었던 정통성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던 카라칼라의 혈통을 주장하여, 그의 인기를 등에 엎으려는 속셈이었다. 곧 율리아 돔나와 접촉하고 있던 카라칼라 황제의 측근들과 함께 에메사 근처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단의 병영을 몰래 방문하였고, 이내 병사들의 추대로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는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된지 이제 겨우 1년여 지난 218년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아홉살난 아들을 공동 황제로 추대하면서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안티오키아로 달아나게된다. 마크리누스는 얼마 후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과 전투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이후 지원군을 얻기 위해 로마로 향했지만 도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결국 암살을 통해 즉위한 근위대장 출신의 황제는 집권 1여년만에, 황제로서 로마 땅도 밟지 못한채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