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23대 황제 「엘라가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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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가짜 안토니누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아내인,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아들로, '카라칼라' 황제의 외가쪽 친척에 해당한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의 아버지 '섹스투스 바리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의원이었는데,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에서 총독으로 있던 중 병사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에메사'(현제의 시리아 홈스)로 돌아와서, 제사장이었던 어머니쪽 가계의 지위에 따라 태양신을 섬기는 대사제로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215년 황제인 카라칼라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을때, 전 황후이자 황제의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도 동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217년 로마와 파르티아가 전쟁 중이었던 시기에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황제의 근위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는 로마 군단병들의 추대로 새 황제로 취임하게 되었다. 카라칼라 황제는 생전에 자식도 없었고, 정해놓은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마크리누스는 로마 군단을 등에 엎고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미 로마에서는 근위대의 손에 암살된 황제도 수명있었고, 로마 군단의 무력을 이용해서 집권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크리누스는 정통성이 없는 만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자들, 특히 세베루스 왕조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율리아 돔나와 그녀의 가족들을 '안티오키아'에 억류시켰다. 율리아 돔나와 율리아 마이사는 마크리누스가 집권하면서, 사실상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과 재산을 빼앗긴체,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카라칼라 황제의 측근들과 접촉하기도 했지만, 결국 율리아 돔나는 스스로 굶어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에 율리아 마이사는 고향이었던 에메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율리아 마이사는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마침 딸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아들인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를 이용해서 타개책을 꾸미게 된다. 이들은 아비투스 바시아누스가 사실 전 황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전 황제의 측근들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에메사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단의 병영을 방문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로마 군단내에서 마크리누스의 평판은 형편없었는데, 사실상 로마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파르티아와의 평화협정과 병사들의 특권과 급료를 조정하려는 행위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카라칼라 황제의 후계자를 자청하는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와 율리아 마이사가 준비한 상당한 금액의 후원금은 병사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동방 군단은 14세의 소년에 불과했던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마크리누스는 이런 움직임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상당수의 로마 군단이 아비투스 바시아누스 쪽으로 투항하였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마크리누스는 완전히 실각하게 된다. 이것으로 자신들에게 위험세력을 제거했다고 생각한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는 상당한 실책들을 범했다. 먼저 동방 일대에서 1년여간 보내면서 로마에의 입성을 미루었는데, 그 사이 그들에게 조언을 한 사람들 중 일부를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또 219년 로마로 입성하면서, 지금까지의 로마 황제들과 다르게, 마치 헬리니즘 군주나 파르티아의 왕 같은 모습으로 치장했으며, 그전까지 자신이 모시던 태양신 '엘리오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로마로 들여왔다. 이런 모습은 로마 시민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모습이었고,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자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의 아비투스 바시아누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가짜 안토니누스', 혹은 '엘라가발루스' 같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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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출신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동방 출신의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엘라가발루스는 에메사에서 믿던 태양신을 로마에 가져와서, 신전을 세우고 스스로를 태양신의 최고 제사장으로 선포하면서 숭배를 강요하였다. 곧 황궁에는 동방에서 데려온 많은 사람들이 들어찼으며, 기묘하고 이상한 의식들을 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크리누스에게 협력했던 인사들의 숙청과 더불어 많은 원로원 의원이나 로마의 저명인사들이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의 공직을 경험한 적도 없으며, 정치나 법률에 대한 교육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통치가 미비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가 저지른 수 많은 기행을 보면, 가히 폭군, 혹은 암군으로 평가 받는 이유를 알만하다. 엘라가발루스는 손님들을 연회에 초청하고는 유리로 만든 음식 모형을 대접하기도 했으며, 음식에 쓰레기나 거미를 섞어 넣는 장난을 쳤다고 한다. 노예들에게 거미줄이나, 전갈, 독사 같은 것을 수집시키기도 하고, 그것을 다시 관료들에게 선물하여 놀라게 했다. 이정도도 황제로서 도를 넘고 있다고 할만한데, 뿐만 아니라 연회에 쓰기 위한 꽃잎을 너무 많이 뿌려서 참가자들 중 일부가 질식사 한적도 있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 베스타(그리스의 헤스티아)의 여제사장을 강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기행과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적인 행동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상당히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또 엘라가발루스는 동성애자였던 것 같은데, 당시 로마에서 동성애를 싫어했던 것도 있지만, 황제가 사람들 앞에서 여장을 하고, 남자 애인에게 아양을 떨거나 하는 모습을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등, 그의 자신에 대한 인식은 로마의 황제가 아닌 동양의 왕이 었던 것 같다. 그는 철저하게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였으나, 로마 밖의 군대에서 생활하는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이러한 내용을 잘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단의 지지는 계속 유지되었고, 그로 인해 황제의 지위도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걸림돌의 제거

당시 로마에서 정치의 실권은 사실상 율리아 마이사가 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엘라가발루스는 18세까지 공식적으로 5번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로 정치적 입지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기괴한 황제와의 결혼을 좋아할 만한 로마 귀족은 상당히 드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결혼 상대의 가족이나 친척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도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의 동성 애인들과 놀아나는데 열중하였고, 일부 총애를 받은 애인들에게는 귀족의 작위를 주거나 여러 특권들을 하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엘라가발루스는 황제로 추대했던 동방의 군단에서도 발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율리아 마이사는 큰 딸과 엘라가발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 같다. 황제였던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둘째 딸인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 '마루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할 것을 권했다. 사실상 공식 후계자로 내세우게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엘라가발루스에 반발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구심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알렉시아누스를 견제하려고 하였고, 심지어는 근위대에 은근히 암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위대는 이러한 요구에 화를내고는, 도리어 황궁으로 쳐들어가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비롯하여, 엘라가발루스의 측근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체를 티베리스 강에 버렸다고 한다. 원로원에서는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황제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엘라가발루스의 후계자가 되는 알렉시아누스가 근위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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