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의 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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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자비로운 황제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목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가 15대 황제로 취임하게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별칭으로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왜 그들이 그를 친근하게 안토니누스 피우스라고 불렀는지 약간이나마 공감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전대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생전에 국가 반역죄 등의 구실을 이용하여 정적으로 숙청하고 있었고, 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원로원에 의해서 사후 신격화가 거부되었는데, 후계자였던 안토니누스가 눈물을 흘려가면서 원로원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하드리아누스가 죽기 전에 사형 명령을 내렸던 원로원 의원들을 구해주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피우스(경건한)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그는 즉위 이전부터도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즉위 당시 일부 반발이 있었던 것 같지만, 큰 반대 없이 황제의 자리를 승계하였다고 한다.

평화로운 로마 제국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집권한 23년 간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집권기 동안 로마 근처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규모 군사 작전은 브리타니아에서 단 한차례 있었으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본인은 로마 군단을 지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39년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를 브리타니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스코틀랜드 남부를 공격하여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그곳에 '안토니누스 장벽'을 지었다. 안토니누스 장벽은 '하드리아누스 장벽'보다 북쪽에 짧게 지어졌으나, 위치상 큰 효용성이 없었는지 이후 서서히 해체되다가 방치되게 된다. 사실 브리타니아에서의 문제도 다른 속주들에서 있었던 움직임들과 비슷한 정도로, 크게 반응하지 않았어도 문제없었던 것 같은데, 이 군사작전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군사적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진행되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집권기간 동안 로마 군단은 상당히 해이해진 것으로 표현되며, 군단에 복무하면서 공직 경험을 쌓고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던 자들은 상당히 불만이 쌓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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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기본적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정책과 노선을 그대로 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행정가로서 로마의 법과 체제 개편을 계속 수행하였고, 도로와 교량, 송수로 등의 인프라 시설을 건설하고 개선하여 로마 시민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하였다. 당시 그리스 지역에 큰 지진이 오는 등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도 있었는데,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화재나 지진 등 재해를 입은 도시에는 세금 징수를 일시 정지시키고, 재건과 회복을 위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국고에서 황제의 정책 수행을 위한 자금과 사적으로 사용하는 재산을 분할하여 공적자금과 사적자금을 나누었는데, 그가 황제로 취임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베푼 금액도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재에서 인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평소에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행동하는 동시에, 유머감각과 온화함도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주변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러한 그는 애처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141년 아내인 '파우스티나'가 사망하자 크게 슬퍼하여, 원로원에 아내를 신격화해달라고 요청하고, 그녀의 이름으로 된 신전을 건설하였다. 아내의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으로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훌륭한 가문의 빈곤한 소녀들을 지원했다고 한다.

죽음과 승계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후계자는 황제 취임 이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바로 하드리아누스의 오촌 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첫 번째 후계자로 젊은 나이에 병사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였다. 이는 모두 하드리아누스가 지정한 것으로, 하드리아누스는 그 둘을 후계자 삼아 양자로 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한다. 실상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들 사이에 끼인 징검다리 형태의 후계자였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별다른 불만은 없었던 것 같고, 임기동안 선정을 펼치고는 하드리아누스가 원했던 대로 후계자 승계를 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노년에도 큰 혼란은 없었던 것 같고 161년에 사망하면서, 이후 두 명의 후계자가 공동 통치하는 형태로 승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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