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운명을 바꾼 「니케아 공의회」
- 역사
- 2023. 4. 19.
로마 황제가 주최한 회의
325년 6월 19일에 '니케아'(현재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당시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주최로 그의 니케아 별궁에서 기독교 주교들이 모여 공의회를 열었다. 본래 로마는 다신교를 숭배하는 국가로, 기존의 로마와 그리스 신들을 중심으로 이집트나 동방의 신들을 믿기도 했으며, 뛰어난 활약을 한 영웅이나 역대 황제들도 사후에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그 숭배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유일신 교리 때문에 사회적 갈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여러차례에 걸쳐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로마제국에서 박해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또 다른 로마 황제인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기는 하였으나, 이 칙령이 공포되기 수년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로마 황제들에 의해 기독교 박해가 지속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단순히 기독교의 허용이 아니라, 우대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는데, 기존에 몰수한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반환하도록 하였고,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니케아 공의회'를 주최하였고, 사망하기 전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첫번째 기독교인 로마 황제로 평가 받는다. 또 십자가형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집권하는 동안 명확하게 기독교에 귀의하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설과, 단순히 기독교의 유일신 교리를 이용해서 제국을 통합시키고, 종교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를 꾀했다는 설로 나뉜다. 어찌되었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니케아 공의회
기독교를 탄생시킨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예수가 사망한지 이미 3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기독교는 유대지역을 벗어나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있었으며, 그 신자들도 매우 다양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고, 그로 인해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러한 교리를 통일시켜 기독교를 하나로 모으고, 그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히고 동시에 제국의 안녕을 도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 전역의 주교 약 1000명에게 서신을 보내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으나, 실제 참석한 주교의 수는 약 318명 정도 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직접 주교들 앞에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공의회의 개막 연설을 했다고 한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화두는 기독교의 신인 '야훼'와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야훼는 원래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의 신이었으나, 신의 아들인 예수가 직접 세상에 나와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 받음으로, 다른 민족들도 믿을 수 있는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독교는 유일신 교리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야훼 이외의 다른 것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훼와 예수가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존재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고, 전통적으로는 야훼와 예수를 동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소위 '아리우스파'로 구분되는 일단의 주교들이 야훼와 예수를 서로 다른 존재로 보는 교리를 내세웠고, 일부 주교들은 둘을 유사한 존재로 보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상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는데, 현대의 시점에서 보자면 천주교에서 성모 마리아상에 기도하는 것을 일부 기독교에서 우상숭배로 보는 것과 비슷한 문제이다. 공의회의 논쟁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한 것이었으나, 그외의 문제들도 일부 논의되었다.
공의회의 결과
이 공의회에서의 논쟁의 결과로 야훼와 예수가 동질의 존재라는 결론이 채택되었다. 이로서 '삼위일체설'의 근간이 되는 내용이 교단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외에도 부활절 축일을 지낼 날짜를 정하는 일이라던가, 사제의 서품과 성직자의 승격에 관한 문제, 교회의 위계 질서에 대한 문제 등 약 스무가지의 규범을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채택된 '니케아 신경'에 대해 아리우스파는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인정받아 파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우스파의 주교들이 바로 그들이 교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고, 그들이 교구에서는 본래 자신들이 하던 대로 계속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설파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공의회가 끝나고서도 주교들을 계속 머물게 하였고, 자신의 즉위 20주년 기념 연회를 열고, 거기서 기독교 사제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로마 제국에서 사실상 기독교와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기독교의 사제들이 로마 황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지만, 동시에 로마 황제의 권위에 복속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로마 황제의 권위를 빌려 정리된 것이기도 하고, 후에 이 교리에 의해 아리우스파는 로마에서 박해받게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