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 변화 「밀라노 칙령」

반응형

벽화

밀라노 칙령

'밀라노 칙령'은 313년 2월 3일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 두명의 황제가 밀라노에서 가진 회담에서 발표된 것으로, 그 내용은 로마 제국에서의 기독교 신봉과 신봉자에 대한 관용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숭배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은 이미 311년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에 의해 공포되었었지만, 그것이 단순히 제국내에서 신앙할 수 있는 자유에 불과 했다면,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 동안 핍박받고 있던 기독교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 이 칙령으로 인해 그 동안 몰수되었던 기독교인이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도록 하였고, 사실상 현직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은 그 이름과 다르게 밀라노에서 선포된 것은 아니고, 당시 로마 제국 동방 황제의 수도인 아나톨리아 지역의 '니코메디아'에서 발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아직 내전중이었기 때문에 실제 반포도 6월 13일로 미루어졌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본래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숭배하였으며, 이후 로마의 영향력이 지중해 일대로 확장하면서, 여러 문화권이 로마에 흡수되었고, 로마가 그 문화들을 존중하면서, 로마 안에서는 수 많은 종교들이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또한 로마에서 자유롭게 인정된 종교였고, 오히려 유대교에 의해 박해받던 발상지인 유대지역을 떠나 로마 제국의 여러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 영향력 자체는 별로 크지 않아서, 밀라노 칙령이 발표될 당시에 로마내에서 기독교 신자는 약 5%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자유가 사실상 보장되고 있던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박해받았는데, 그 처음을 찾아보면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제' 때의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는 제5대 황제였던 '네로'의 집권기 인데, 로마에서 일어난 이 화재는 그때까지 역사상 유래가 없었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간이나 화재가 지속됬으며, 로마 전체의 2/3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로마 대화제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가 방화했다는 소문이 것잡을 수 없이 퍼졌고, 이에 네로는 성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당시에는 로마에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돌렸다고 한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 교인들은 로마의 국가 행사에 대해 이교도의 행사라며 참석하지 않았고, 신앙적 이유로 군대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고작은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대재난의 분출구가 된 기독교도들은 네로에 의해 붙잡혀 처형되었고, 이때 처형된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한다. 그러나 네로의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인 이유의 박해였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의 학살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음으로 기독교 박해로 대표적인 황제는 제16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부터 180년에 걸쳐 로마 제국을 통치했는데, 그의 집권기 동안 로마의 '테베레' 강이 범람하거나, 안토니누스 역병이 퍼지고, 마르코만니 전쟁이 벌어지는 등 여러 재난들이 일어났고, 이러한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파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의식을 거행하고 신들에게 제사지내도록 포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 이러한 명령을 거부하였으며, 자신들의 신앙 이외의 것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정의하며 배척하고 모욕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지역에 걸쳐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법을 어기거나 혼란을 일으킨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처벌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직접지시했다기 보다는, 로마의 전통사회와 새로운 신앙인 기독교의 교리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로마에서 기독교에 대해 조직적이거나 정책적인 박해를 했다기 보다는, 기독교 특유의 교리와 사상이 전통적인 사회와 융화되지 못해 일어난 사회적 박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박해는 '군인 황제 시대'에 와서도 계속되는데, 대표적으로는 로마 제국 제30대 황제인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데키우스'와 제33대 황제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의 통치시기 이다. 데키우스는 249년부터 251년 전사하기 전까지 제국을 통치하였는데,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의 성격도 앞서 언급한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와 비슷하다. 로마 제국은 계속된 내란으로 피폐해 있었고, 이러한 시기를 틈타 침략해 오는 이민족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고 있었다. 데키우스는 이것이 로마의 종교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로마 다신교를 부흥시키는데 힘썼다. 이에따라 오래된 신전을 복원하거나 새로운 신전을 신조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으며, 로마 시민들은 모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또 이러한 사항을 감독하는 관리를 두고 충실히 이행한 자들에게는 증명서까지 발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시한번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교리에 따라 이를 거부하였고,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사회질서의 파괴자로서 처벌당하였다. 이때 제20대 교황인 '파비아노'가 순교하였고, 여러 주교들이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유대교는 별도로 박해받지 않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유대지역에서 그들끼리 주로 활동하였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치침에 따라 전통적인 종교로서 존중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의 방식은 발레리아누스의 집권기에는 완전히 바뀐 양상을 보여준다. 발레리아누스는 257년과 258년에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리우는 칙령을 공포하고, 엄격히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발레리아누스는 명확하게 기독교인을 지정하여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주로 로마의 상류계층에서 로마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한, 소위 사회 지도계층으로서 로마 사회를 위한 의무행위를 거부한 자들의 칭호과 명예, 재산을 박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법에 따라 처형하였다. 이때에 로마의 저명한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었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통치자가 사회현상으로 일어났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정책적으로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본격적인 탄압은 제43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집권기로 이어진다. 발레리우스의 박해 이후로 로마 제국에서 한동안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없었고, 기독교는 그 동안 상당히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서, 교세가 강했던 제국의 동방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기에 디오클레티아우스는 황제와 신을 일원화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더욱 공공히 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요비우스'(제우스)라고 자칭하기도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먼저 공직에서부터 시작하여 신들에게 제사 지내도록하였고, 303년에는 니코메디아의 황궁에서 발생한 화재를 원인으로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기독교 탄압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고, 교회와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사제와 주교들을 체포하여 제사를 강제하였으며 따르지 않으면 처형하였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동방의 일부지역에서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군대를 보내어 진압하였다고 한다. 304년에는 아예 기독교인에 대해 고발이 없어도 조사하거나 고문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 명령을 어기면 강제 노역에 처하거나 처형하였다. 이에 기독교에서는 이 시기를 '대박해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을 4분할해서 각각 통치하였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지역에서는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 정도가 덜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전파된 마니교 또한 이교로서 박해 받았고, 이것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적 이유로 인한 박해로 보이며, 사실상 로마 제국의 마지막 기독교 박해가 되었다.

반응형

콘스탄티누스 대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있었던지 겨우 10여년만에 밀라노 칙령을 시작으로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박해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로마 제국의 분위기의 전환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부모가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라던가,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이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종교를 통해 로마 제국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단지 그 대상 종교가 기독교였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집권하는 동안 사실상 기독교 우대 정책을 펼쳤으며,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는 등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도 마다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에는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이지, 로마는 다신교의 정책을 계속 취하고 있었으며,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후대의 기독교 시대에서 역사학자들에게 대제 또는 성제라고 불리우면서 찬양받게 되었고, 반대로 기독교를 탄압한 것으로 보여지는 다른 황제들은 상당한 악평을 받고있다. 그야말로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이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영향력이 계속되어 기독교 중심의 중세 암흑시대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 시절과 다르게 기독교는 상당히 관용적으로 변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