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공화정 카이사르의 숙적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과학
- 2023. 3. 28.
평민파와 원로원파의 갈등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기원전 106년에 이탈리아 북부의 '피케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로 피케눔 지역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기원전 89년에 집정관을 지낸 로마의 정치가였다. 기원전 91년 로마에서 이탈리아 반도내의 동맹 도시의 시민들과 로마 시민들 간의 내전인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폼페이우스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기도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18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지휘하에 있는 군단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하자, 침착하고 단호하게 제지하여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기원전 87년에는 평민파와 원로원파 사이의 갈등으로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평민파에 의해 숙청되었으며,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히스파니아' 지역으로 도피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로 인해 숙청을 피할 수 있었고, 크라수스와 다르게 가문의 재산과 토지도 지킬 수 있었다. 기원전 83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끝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에서 돌아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자, 3개의 군단을 모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때 술라와 사람들은 23세의 폼페이우스가 많은 병사들과 함께 온 것을 보고 놀랐는데, 이 군단은 이미 동맹시 전쟁때 함께했던 병사들로 사실상 폼페이우스의 사병화되어있어, 당시에 이미 로마 군단의 사병화가 상당히 진행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라의 지휘아래 원로원파는 순조롭게 로마를 장악하였고, 술라에 의해 대대적인 평민파 숙청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폼페이우스처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젊은 나이로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독재관이 된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사, 자신의 양딸인 '아이밀리아'와 혼인시켰다. 술라 휘하에서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평민파 잔당 소탕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로마법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잔인한 숙청 방식 때문에 적들에게는 악명 높았지만, 아군에게는 상당히 선호된 것 같다. 군사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로마까지 와서 개선식을 요구하였는데, 술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개선식을 허가해주었으며, 이때 폼페이우스에게 '마그누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술라 자신도 로마 군단을 이끌고 로마시까지 진격하여 성문앞에서 전투를 벌인 전적이 있긴 하지만, 폼페이우스 또한 이미 자신의 군단을 사병화하여 로마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등, 엄밀히 따지자면 로마법이고 정통성이고 무시하는 처사를 하였지만, 폼페이우스가 올린 전공과 개선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내서, 로마 시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승승장구
술라가 죽고 난 후에도 평민파와 원로원파 사이의 갈등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는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7년에 전직집정관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 도시의 시민들과 함께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도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이번에는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민파 반란군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29세의 나이로 자격있는 공직에 종사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군단을 지휘하여 원정을 가는 것은 술라가 개혁한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가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무력시위하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술라가 개혁한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결국 원로원에서는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 직함을 주고 원정을 승인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폼페이우스가 술라와 원로원파에 합류한 것은 어떤 정치적 대의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부친의 복수나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위한 행위로, 술라와 원로원파의 개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스파니아에는 이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세르토리우스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합류하면서 세력이 커진 로마 군단은 더욱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의 군사적 재능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세르토리우스는 두 사람의 로마 군단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싸움을 진행하였으며, 결국 숫자에 밀리기 시작하였을때도 기원전 73년까지 무려 5년이나 로마 군단을 괴롭히면서 버텼다. 그러나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살해당하면서 반란이 종식되었다. 그동안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기원전 73년부터 노예 검투사들에 의해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발발하여 크라수스가 군단을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기원전 71년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귀환하면서 또 다시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개선식을 치루게 해 줄 것과 집정관에 취임시켜 줄 것을 요구하며 무력으로 시위하였다. 같은 해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종식시킨 크라수스 또한 군단을 해산시키지 않고 무력으로 집정관직을 요구하였는데,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서로 비밀리에 협약을 맺고 같이 행동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개선식을 하였지만, 원로원에 의해 크라수스는 개선식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 때문에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기원전 70년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같이 집정관을 지냈다. 집정관에 취임한 후에는 술라에 의해 사실상 사문화된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키는 등 술라의 개혁을 철폐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67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호민관에 당선시키고, 그의 권한을 이용하여 막강한 특권을 얻어냈다.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모든 지중해와 해안에서의 군사지휘권을 3년간 보장받은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겨우 3개월만에 지중해의 거의 모든 해적을 소탕하였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번에는 다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는 지휘권을 따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원로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고, 먼저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하고 있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폼페이우스에게 강제로 지휘권을 빼앗기고 로마로 소환되었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는 5년의 임기를 가지고 동방에 부임하였는데, 미트리다테스 6세의 문제는 사실상 루쿨루스가 7년에 걸쳐 거의 끝내놨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파르티아'와 폰토스의 우군이었던 '아르메니아'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외교적으로 배제시키고 군대를 이용하여 천천히 압박하자, 기원전 64년에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미트리다테스 6세가 사망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동방에 남아서 남은 임기동안 지휘권을 계속행사하면서 원정을 계속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와 유대 지역으로 진출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집트에 이르는 동방 지역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로인해 로마는 동방에서의 영향력 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입을 얻게 되었으나, 이것은 완전한 월권행위이며 불법행위였다. 기원전 61년에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번째 개선식을 올렸으나, 그의 거듭된 로마법과 원로원을 무시하는 행위로 인해, 로마에서 원로원에 의한 상당한 정치적 견제를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군단을 이용하여 무력시위를 하지는 않았다.
삼두정치
이번에는 군단을 해산하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퇴역병사들을 위한 토지법과 동방 정책을 인준받으려고 하였지만, 이미 군다을 해산한 폼페이우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일부로 무시하면서 무려 3년의 시간동안이나 그의 법안을 묵혀두었다. 이는 그의 그동안의 법과 원로원을 무시한 행실, 그의 로마 내부에서의 높은 인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생긴 원로원 의원들의 시기심 같은 것이 한대 뭉쳐서 생긴 결과로 보이는데, 이로인해 사람들이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정치연합체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기가 높고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주류에서 배척당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 정치적 영향력은 어느정도 있지만, 반면 내세울만한 공적이 별로 없어 인지도나 인기면에서 크게 떨어지는 크라수스는, 그 성격면에서도 접점을 찾기 어렵지만, 로마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런 로마의 거두 두 사람을 정치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생기가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당장 처리해야 될 정치적 과제가 있는 폼페이우스와 받아내야 할 상당한 액수의 빚을 빌미로 두 사람을 연결하여 비밀리에 삼두정치라는 정치적 연합체를 결성하였고, 세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위한 농지법을 통과시키고, 여러 개혁법안을 시행하였으며, 임기후에는 자신이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 될 수 있도록 안배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이 정치적 동맹을 더 공고히 하였다. 이후에 삼두정치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기원전 55년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시 같이 집정관에 취임하였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총독 자리를, 그리고 크라수스는 시리아 지역의 총독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런 삼두정치의 구조가 결국 무너지게 되는데, 기원전 54년 시리아 총독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던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도 출산중 사망하여 두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카이사르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미 폼페이우스를 넘어섰으며,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제안한 두번째 혼인동맹을 거절하고, 기원전 52년 원로원파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의 딸과 결혼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에 협조하면서 다시 집정관 자리에 취임하였으며,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가 끝나 로마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원로원의 힘을 이용하여 그를 정치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로마 정치계에서 숙청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같은 방식으로 폼페이우스도 제거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결국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를 위시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결국 기원전 49년에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권고 발동하자 카이사르가 1개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루비콘 강 도하를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이나, 내전의 시발점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카이사르의 축출은 훨씬 이전부터 원로원 안에서 사실상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루비콘 강 도하를 문제삼는다면 폼페이우스는 이미 3~4번은 처형되었을 것이다.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사실상 사병화된 10개의 군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적으로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었을 뿐더러 카이사르의 정치적 인기나 영향력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내에 많은 도시들이 카이사르의 편을 들어, 그의 군단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으며, 로마 시민들 또한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몇번의 저항은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무산되었으며, 몇개의 급조한 군단이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하거나 탈형하였고, 이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로 탈출하였다. 사실 갈리아 지역과 이탈리아에서는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우세하였지만, 나머지 그리스,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동방 지역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직접적으로 대치해야 할 집적적인 이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놀아나지 않았다면 둘다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놓치면서 내전의 영향은 로마 전국토로 확장되었다. 카이사르는 먼저 히스파니아 지역을 제압하면서,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 지역에 상륙하기 위해 기회를 보았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함대의 방해를 피해 그리스에 상륙하는 것이 성공하였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리스는 사실상 적지에 가까웠으며 해상에서도 폼페이우스의 함대의 방해로 제대로 보급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카이사르는 항복한 자들과 포로로 잡힌 자들을 사면해주었으며, 협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불리한 상황에서 여유가 별로 없었던 카이사르는 내전을 빠르게 끝내기 위해 적은 병력으로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근거지에서 병력 숫자도 많고 보급도 원할하였던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포위망을 공격하여 카이사르의 군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그리스 동부의 '테살리아'로 이동하여 인근 도시를 점령하면서, 폼페이우스의 영향력을 제거해 나갔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근거지의 이점을 살려 계속 유리하게 장기전으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폼페이우스와 함께 있었던 원로원 의원들이 지금의 우세한 상황을 이용해서 카이사르와 결전을 벌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파르살루스 전투와 최후
그대로 장기전으로 갔으면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그리스를 정복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든 기원전 48년 테살리아 인근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서로 맞붙었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폼페이우스 군단은 보병 47,000명에 기병 7,000명 이었던데 비해, 카이사르 군단은 보병 22,000명에 기병 1,000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카이사르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해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카이사르의 군단이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많은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정예 보병을 따로 편성하여 대응하게 하였고,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패퇴하고 보병들이 옆에서 공격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진형이 붕괴하여 패배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진형이 붕괴되는 것을 보자 패배를 눈치채고 도주하였고,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진영을 포위하면서 24,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진영에 있던 원로원 의원들도 붙잡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즉시 이들을 사면하고 석방해 주었으며, 로마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가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의탁하여 다시 세력을 규합할 작정이었던 것 같지만, 이집트에 상륙한 그는 배신당해 살해 당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머리는 그를 추격해온 카이사르에게 보내졌는데,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만약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었다면 사면되어 해방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때 로마의 영웅은 최후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