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를 끝낸 「사두 정치」
- 역사
- 2023. 4. 21.
4명의 황제에 의한 통치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뀐후에 즉위한 황제 중에는 근위대의 힘을 빌려 즉위하거나, 근위대에 의해 암살되어 폐위된 황제들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황제위를 둘러싸고 근위대나 로마 군단이 개입한 정도가 아닌, 근위대와 군단이 멋대로 황제를 세우고, 여러 황제들에 의한 내란과 폐단이 지속된 시기인 235년부터 284년까지를 '군인 황제 시대'라고 한다. 이 군인 황제 시대는 284년 군단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로부터 끝을 맺는 것으로 되어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 다음해인 285년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지휘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를 부제(카이사르)로 임명하여 제국의 통치를 돕게하였다. 그러나 이때 막시미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한 것은 자신의 후계자라는 의미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 통치자였고, 286년에는 막미시아누스를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고, 로마 제국의 서쪽을 관리하게 하여 그 의미를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253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부자가 공동 황제로서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한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갈리에누스가 공동 통치자 이지만 후계자의 위치에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93년에는 이른바 '사두 정치'(Tetrarchia)를 실시하게 된다.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각각 정제를 한명씩 총 두명을 두고, 다시 두명의 정제 아래에 부제를 한명씩 두면서, 4명의 황제가 제국을 4분할하여 통치하도록 하였다.
사두 정치 체제
4명의 황제가 동시에 통치하는 체제이긴 했으나, 4명의 황제 사이에는 별도의 암묵적인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 '세니오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선임 정제로서 차별화 하였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내렸다. 사실 이러한 사두 정치 체제는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황제의 권위 자체를 나눌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 각 지역을 관할하는 황제의 존재를 이유로 속주를 개편하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약화시켜 군단을 이용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에 일어난 황제위에 대한 많은 도전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많은 궁리를 한 것 같은데, 원로원의 입법권한도 박탈하여 때때로 황제에 도전하던 원로원의 권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황제를 중심으로한 관료적 통치를 실시함으로,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모색하였다. 마지막으로 황제위가 가장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권력의 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제 아래에 미리 부제를 둠으로서, 갑자기 황제가 없어지더라도 안정적으로 제국이 운영될 수 있도록 모색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개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그의 개혁을 보면 상당한 수완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그의 권위 아래에서 사두정치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20여년의 임기를 마치고,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황제의 자리에서 은퇴하자, 사두 정치 체제는 바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인간
정제들이 은퇴하자 새로 정제가 된 사람은 서방의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동방의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로 각각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갈레리우스가 선임 정제로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서방과 동방의 부제로 자신의 심복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외조카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임명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도 다른 정제와 부제들을 직접 임명하였고, 황제들 간의 결속을 위해 정제들의 딸을 부제들과 결혼시키는 등의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편향적인 갈레리우스의 인사정책 자체는 문제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방의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로 취임하면서 사두 정치 체제의 근간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제 즉위는 군인 황제 시대의 전례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실상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먼저 갈레리우스에게 황제 취임 승인을 요구하였고, 이에 내란을 우려한 갈레리우스가 세베루스를 정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를 부제로 임명하는 식으로 혼란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아버지의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은데다가 정식으로 부제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정제가 되는 것은 큰 문제만 없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씨는 다른 곳에서 불이 붙게 되었는데, 바로 은퇴한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에 의해서였다. 막센티우스는 전 황제의 아들이자, 현 황제인 갈레리우스의 사위이기도 했는데, 그 동안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들어 놓은 정치 체제 때문에, 권력에서 소외된 입장이었지만 묵묵히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제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예외적인 상황이 생겼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먼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갈레리우스에게 자신도 황제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결국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황제를 참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사두 정치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