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고문회의 변호사 '조르주 자크 당통'은 1759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의 '아르키쉬르오브'(Arcis-sur-Aube)에서 태어났다. 당통은 유아기에 집의 목장을 기어 다니다 황소에게 공격을 받거나 천연두를 앓는 등의 이유로 얼굴에 흉터가 있었는데, 상당히 호방한 성격이었던 듯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당통의 아버지는 중급 변호사였지만, 그가 2살 무렵에 사망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이후 1770년에 어머니가 곡물상인과 재혼하면서 경제상황이 나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13살 무렵에는 집을 떠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처벌을 받게 된 친구를 감싸고 체벌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하였으며, 학교장을 설득하여 체벌 금지를 관철시키는 등 정..
불우한 어린 시절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는 1758년에 프랑스 북부 도시인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었으나 부유층에 속했는데, 그의 선조들은 관료와 상인으로 활동하며 부를 축적하였고, 그의 조부는 아라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부모는 그를 임신하게 되어 서둘러 결혼하였고, 그로 인해 그의 조부와 불화가 생겨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어머니는 그가 6세 무렵인 1764년에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아버지도 약 2년 후에 행방불명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남동생은 외조부집에, 여동생들은 고모들 집에 맡겨졌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로베스피에르는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은..
가난한 남부 출신의 재단사 '앤드루 존슨'은 1808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롤리에서 태어났다. 존슨의 집안은 본래도 형편이 좋지 못했는데, 그가 3살 때 아버지가 얼어붙은 강에서 3명의 사람을 구출하고는 저체온증과 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더 안 좋아졌다. 이후 존슨의 어머니가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그 때문에 존슨은 10세 무려부터는 형 '윌리엄 존슨'과 함께 재단사의 도제로 들어가 일을 해야 했으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해서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정도만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존슨은 도제 계약에 따라 21살까지 조수로 일해야 했다고 하는데, 그는 수습 생활을 시작한 지 약 5년이 지나자 기술을 다 배웠다고 생각해 조바심을 갖게 된 것 같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프랑스의 공주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은 176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의 딸로 태어났다. 루이 페르디낭은 본래라면 왕위를 계승하여 '루이 16세'가 되어야 했지만, 엘리자베트가 태어난 이듬해인 1765년에 36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요제파' 또한 1767년에 3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엘리자베트는 겨우 3살 때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된 것인데, 이후 마루산 후작인 '마리 루이즈'의 아래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녀는 매우 어린 나이에 불우한 가정환경을 갖게 되었지만, 마리 루이즈 여사의 돌봄을 받으며 자애 넘치고 신앙심이 깊은 성격으로 자라났다고 하며, 왕이 된 오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도 친분이 돈독했..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에 미국 켄터키 주의 하젠빌 인근의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다. 링컨의 집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새뮤얼 링컨'은 영국 이민자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하여 수습 직조공으로 생활했다는 것을 보면 그리 부유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링컨의 할아버지대에 와서는 버지니아 주의 지역 민병대 대장으로 일대에 넓은 땅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링컨의 아버지인 '토마스 링컨'도 새로 이주한 켄터키 주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그는 지역의 배심원 역할을 맡았으며, 토지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지역 순찰대로 봉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링컨이 7세 무렵인 18..
왕으로서의 자세 1789년 프랑스에서는 당시 소집된 '삼부회'가 귀족 및 성직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과 평민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파행되면서 민중 혁명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봤을 때 혁명은 생각보다 상당히 온건하게 진행되었는데, 왕인 '루이 16세' 또한 개혁에 대해 어느 정도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고, 그가 자신의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피하였기 때문에 혁명 세력은 적은 희생으로 성과를 볼 수 있었다. 또 혁명 세력이 구성한 통치 기구인 '국민의회'에는 개혁적인 귀족 세력들도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드 미라보'같은 왕을 유지한 ..
성공한 변호사 '제임스 뷰캐넌'은 1791년 펜실베이니아 주의 머서스버그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주민이었는데, 머서스버그에서 농장과 잡화점을 운영하며 부동산 투자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이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아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뷰캐넌도 유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상점에서 일하며 산수와 부기를 배웠고, 마을의 교회에서 목사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 칼라일에 있는 '디킨슨 대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는데, 도중에 교칙을 어겨 한번 퇴학당하기도 하였지만, 개심하여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1809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해 말 뷰캐넌은 랭..
혁명 전야 1789년 '바스티유 습격'이 일어나기 전의 프랑스는 혼란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프랑스를 개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의 한계로 생각이 신분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추진력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재정 상태는 전전임인 '루이 14세' 이후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미국 독립 전쟁'에 개입하는 등 사실상 파탄난 상태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후 악화로 대흉작을 겪기도 하였는데, 연이은 홍수와 가뭄, 추위 등의 재난을 겪은 시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에 따라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반면 기득권층인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이러한 개혁 움..
르네상스 군주 '헨리 8세'는 1491년 영국의 그리니치에 있는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영국의 왕인 '헨리 7세'로, 그는 젖을 떼기도 전인 1493년에 드바 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듬해인 1494년에는 왕의 차남이자 왕위 계승권자 2위의 신분으로 요크의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명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잉글랜드 문장원의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의 자리에 앉게 된다. 헨리 8세는 왕가의 일원으로 어렸을 적부터 유복한 생활을 하며 우수한 교육을 받았는데, 형인 '아서 튜더'가 차기 왕으로 확정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신 종교계의 직분을 받기 위해 요크 대주교였던 '토머스 울지'가 가정교사를 맡았다. 그는 우수한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
교룡득수 '양대안'(楊大眼)은 중국 남북조시대 사람인데, 무도의 저족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용맹하여 호랑이를 잡아 죽인 일도 있다고 하며, 특히 달리기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양대안은 저족의 지도자였던 '양난당'의 혈통이었지만 분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영향력도 없었으며, 상당히 가난한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이후 아버지가 북위의 관리로 임명되면서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북위의 '효문제'가 남방 원정을 시도할 때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상서인 '이충'에게 병사들을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양대안은 출세하기 위해 자진해서 나섰으며, 선택되기 위해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는 등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양대안은 말처럼 빨리 달리는..
병약하고 소심한 왕자 '조지 6세'는 1895년 영국 노퍽 주의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로, 그는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와 아버지인 '조지 5세', 그리고 형 '에드워드 8세'에 이은 왕위 계승자 4위였다. 조지 6세는 영국의 왕족으로 상당히 유복한 생활을 하였지만, 어렸을 적부터 병약한 체질에 심한 말더듬이 증세가 있었으며,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본래 왼손잡이였는데,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받는 등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은 이러한 그의 성격에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 6세는 차남으로 왕위는 형이 물려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은 덜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9년에는 오스본에 있는 왕립 해군 사관학교..
수나라 말 군웅할거 시대 '울지공'(尉遲恭)은 585년경 중국의 수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삭주 선양현 출신으로 자는 '경덕'(敬德)을 썼다. 울지공은 북주에 상주총관을 지낸 촉국공 '울지형'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580년에 '양견'이 승상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일족이 모두 천민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울지공은 상당히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같은데, '수양제' 시절에 '적송백'이나 '유보강' 등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참여하였고, 여기서 공을 세워 조산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나라는 이미 수양제의 폭정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는데, 617년에 '유무주'가 마읍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울지공은 유무주의 휘하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 수나라에서는 수많은 반..